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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부도 이혼투쟁 빡세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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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법이 이혼 불허… 헤어지고 싶은 남자, 갈라서기 싫은 남자의 잔머리와 넌더리

조선시대는 이혼법이 존재하지 않아 공식적인 이혼은 성립할 수 없는 사회였다. 다만 예외를 두어 소수의 이혼을 처리했는데, 끝내 이혼하고 싶은 남자와 이혼하지 않기 위해 버티는 여자의 싸움은 왕에게까지 올라가 국론을 논쟁하는 자리의 사안이 되기도 했다. 사진은 조선후기 양반부부

조선시대는 이혼법이 존재하지 않아 공식적인 이혼은 성립할 수 없는 사회였다. 다만 예외를 두어 소수의 이혼을 처리했는데, 끝내 이혼하고 싶은 남자와 이혼하지 않기 위해 버티는 여자의 싸움은 왕에게까지 올라가 국론을 논쟁하는 자리의 사안이 되기도 했다. 사진은 조선후기 양반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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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했지만, 조선시대 양반사회에선 국법에도 없는 이혼을 어찌해볼까 하는 궁리가 제법 심도 있게 이뤄졌다. 그만큼 결혼은 깰 수 없다는 사회적 통념이 완고하던 시절에도 이를 참지 못한 개개인의 의견과 감정이 곳곳에서 분출됐던 것. 조선시대의 이혼은 어렵지만 빈번했고, 은밀하지만 치열하게 삶의 현장에서 펼쳐졌다.


첩첩산중, 조선시대의 이혼
공식적으로 조선은 이혼법을 따로 두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국가를 지탱하는 핵심단위인 ‘가족’의 해체를 야기하는 이혼을 애초에 허락하지 않겠다는 군주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헤어지겠다는 부부를 막을 수는 없는 법. 1704년(숙종 30년) 선비 유정기는 예조에 상소를 올렸다. 14년 전 쫓아낸 부인과 법적으로 완전히 갈라서고 싶으니 국가에서 허락해 달라는 그의 간곡한 청과 함께 올라온 사헌부의 상소에 의하면 그의 아내 신태영은 지아비는 물론이요 시아버지에게 욕을 일삼고, 제사상에 올리는 술에 오물을 섞는가 하면 사당에서 난동을 부려 제기(祭器)를 훼손한 천하의 악처였다.

당대의 명문가인 기계 유씨 집안의 지지와 조정 신료들의 지원사격에 숙종이 이혼을 허락하려는 차, 예조판서 민진후가 유정기가 제시한 증거의 객관성 부족을 들어 반론을 펼쳤고, 이혼논쟁이 장기전에 접어들면서 이 지난한 소송이 끝나기 전 유정기가 먼저 세상을 떠나 끝내 이혼은 무산됐다.

양반들은 칠거를 들어 아내를 내쫓고자 했고, 법은 삼거를 통해 아내의 퇴출을 방지해왔다.

양반들은 칠거를 들어 아내를 내쫓고자 했고, 법은 삼거를 통해 아내의 퇴출을 방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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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거지악과 삼불거
지아비가 아내를 내칠 수 있는 칠거지악(七去之惡, 불효, 불임, 음탕, 질투, 나쁜 병, 말 많음, 절도) 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졌다면 조선은 이혼남녀 천지였을 것이다. 일찍이 이를 간파한 조정은 칠거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내쫓을 수 없는 삼불거(三不去, 돌아갈 곳이 없음, 부모상을 함께 치름, 가난할 때 같이 고생해 집안을 일으킴)를 두고 여성과 가정을 최소한으로 보호했다. 허나 양반가에서나 칠거와 삼불거를 두고 논쟁이 오갔지, 평민과 천민사이의 이혼은 비일비재했다.

최덕현이 작성한 수기. 한글로 적은 그의 이름과 손의 모양을 기입한 수표로 미루어 최덕현의 신분이 양반이 아니라 양민 또는 천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 전북대학교 박물관

최덕현이 작성한 수기. 한글로 적은 그의 이름과 손의 모양을 기입한 수표로 미루어 최덕현의 신분이 양반이 아니라 양민 또는 천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 전북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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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자료 35냥에 간통한 아내를 내준 남자

“그간 어려운 살림에도 동고동락한 아내는 이제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갔으니 슬프도다.” 남자의 슬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칼로 죽이는 것이 마땅하나 앞날을 생각해 용서라고 엽전 35냥을 받는 것으로 영원히 우리의 혼인 관계를 파하고, 위 댁으로 보낸다. 이 수기가 증빙할 것이다.” 아내를 칼로 도륙하겠다던 남자의 분노는 갑자기 35냥의 등장과 함께 ‘위 댁’에 아내를 보낸다는 말로 끝맺음하니 이상한 노릇. 을유년 12월 20일에 작성됐다 기록된 ‘최덕현 수표’는 당시 평민 또는 천민으로 추정되는 최덕현이 35냥의 위자료를 받고 ‘댁’이라 불러야 하는, 아내와 간통한 높은 사람에게 부인을 보내주며 작성한 일종의 이혼증명서다. 필경 누군가 대필해줬을 한자 옆 자신이 한글로 기재한 이름 ‘최덕현’과 두툼한 수장(手掌)만이 눈물을 곱씹고 아내를 내어준 남편의 분노를 오롯이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허지의 아내 유씨는 첩을 사랑하는 남편을 참다 못해 남편 형상을 한 짚 인형을 만들어 사지를 자르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허지의 아내 유씨는 첩을 사랑하는 남편을 참다 못해 남편 형상을 한 짚 인형을 만들어 사지를 자르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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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만 사랑하는 남편 저주 인형을 만든 아내

1622년 (중종 17년) 파주목사 허지의 아내 유씨는 그 악행이 한양까지 전해져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는데, 첩을 질투한 나머지 남편을 능멸하고 구타한 것이 그 죄목이었다. 투기에 눈이 먼 그녀는 남편을 저주하여 볏짚으로 사람형상의 인형을 만든 뒤 여종들 앞에서 그 사지와 몸통을 절단하며 “이것이 허지다”라고 했는가 하면, 남편이 사신 업무 수행차 집을 오래 비우자 하인들로 하여금 문밖에서 곡을 하라 시킨 뒤 “허지가 사망했으니 초상난 것을 알려라”라고 태연히 대꾸했고, 이웃집 수탉이 암탉을 쫓다 자기 집으로 날아들자 수탉을 잡아다 따져 묻기를 “너의 집에도 암탉이 있는데 이웃집 암탉을 쫓아다니니, 이는 역시 허지와 같은 류다” 하며 즉시 날개를 뽑고 사지를 분해하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유씨의 패악을 전해 들은 조정 대신들은 그녀를 ‘살인을 도모한 율’에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예외적으로 이혼시키는 것으로 대신해야 할지 논의했으나 곧 중종이 “이혼은 위에서 명령할 것이 아니라 곧 허지 본인이 할 일이다”며 사안의 처리를 남편에게 넘겼다. 실록에는 그 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정황상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결혼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 누명을 쓰고 이혼당할 뻔 했던 방구달의 아내 김씨는 친히 명을 내린 세종의 교지를 통해 다시 남편과 살 수 있었다.사진 = 김홍도 '신행도'

결혼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 누명을 쓰고 이혼당할 뻔 했던 방구달의 아내 김씨는 친히 명을 내린 세종의 교지를 통해 다시 남편과 살 수 있었다.사진 = 김홍도 '신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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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아내를 내쫓으려 누명을 씌운 사내

예나 지금이나 얼굴이 잘생기거나 예쁘면 결혼시장에서도 인기가 높은 것은 자명한 사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엔 어땠을까? 1428년 (세종 10년) 군자감 소속 관리였던 방구달은 부모 간의 결정으로 아내 김씨를 맞았으나 그녀의 얼굴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독히도 추녀였기 때문. 국법조차 금한 이혼이지만 방구달은 못생긴 아내와 얼굴을 맞대고 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박 놓는 것보다 아예 아내를 내쫓고 새장가를 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당시 처가 간통하였을 경우 이혼을 허하는 정책의 허점을 노리고 아내 김씨가 처녀가 아니라고 무고(誣告)한 뒤 혼인 며칠 만에 그녀를 마음대로 내쫓았다.

억울한 김씨 집안이 움직였을까, 누군가 고변한 것일까. 방구달의 행각은 의금부로까지 그 내용이 새어나가 세종의 귀까지 들어가게 됐고, 세종은 방구달의 죄를 엄히 물어 장 60대, 도 1년을 명한 뒤 이후 다시 살림을 합쳐 살도록 명했다. 박색한 부인을 내쫓으려다 곤장과 사회적 망신만 얻은 셈이었다.


조선시대의 엄격한 이혼제한정책은 결국 사회적 약자인 아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 형식적인 혼인관계만 유지하게끔 하는 양날의 칼과 같은 역할로 무려 500년간 지속된다. 지금도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쇼윈도 부부의 숫자는 아마 조선시대에 훨씬 더 많았을 것이고, 이혼은 오로지 일방적 이혼만 가능했으므로 알게 모르게 법 바깥에서 보호받지 못한 이혼녀의 숫자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가족이란 연대의식이 희미해진 오늘날의 관점에서 조선시대 선조들의 이혼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 아닐 수 없지만 늘 도전하는 사람들은 나타나기 마련이며 기록을 통해 그 지난한 과정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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