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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그 사람들]⑪고니시 유키나가, 약장수 출신의 선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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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사진= 위키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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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正)와 함께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의 장수 중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에서는 선봉장이었고 부산포부터 평양까지 밀고 올라가며 초반 주요 전투를 모두 거친 1군 사령관이라 매우 비중있게 다뤄진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원래 오사카 지역 상인 출신으로 약재상을 했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의 시종으로 있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사무라이도 아니었고 영주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히데요시가 자기 친위세력으로 만든 규슈 지역의 소영주였다.
이런 그의 특이점이라 한다면 독실한 카톨릭 교회 신자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고니시는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으며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천주교 신자였다. 조선을 침략했을 때도 그의 진중에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으며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자신의 부하이자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도 카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다.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됐다.

히데요시가 조선과의 전쟁을 발표하자 원래는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사위가 대마도주로 전쟁이 일어나면 대마도 뿐만 아니라 규슈 지역도 교역이 끊어지면서 막대한 경제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또한 카톨릭 신자임을 내세우며 전쟁에 크게 반대했다. 그러나 막상 히데요시가 워낙 강하게 전쟁을 밀어붙이자 자진해서 선봉장이 됐다.

임진왜란 개전 이후 부산포 전투를 시작으로 한양까지 그야말로 천리행군을 이어갔는데 음력 4월14일 개전 후 불과 20여일 후인 5월7일 한양에 당도한다. 그의 1만8000명에 이르는 보병부대는 400km가 넘는 길을 계속 전투를 벌이며 걸어서 20일만에 돌파한 셈이다. 그러나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이를 뒤쫓는 신세가 되면서 보급선이 길어지고 군사들은 매우 피로한 상황에 놓였다. 결국 명군까지 개입하자 고니시는 평양성에서 일단 진격을 멈추고 적당히 명나라와 협상에 나서고자 했다.
고니시는 명나라의 국제사기군인 심유경과 함께 열심히 교섭을 하면서 명나라 황실, 조선 왕실, 히데요시 3개국 정상을 동시에 속이는 사상 초유의 사기극을 펼친다. 일본의 조공을 요구하는 명과 조선 8도 중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4도를 요구하며 명의 황녀와 결혼하겠다는 히데요시 사이에서 강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은 명나라 조정과 히데요시 쪽에 모두에게 거짓을 고한다. 명에는 모든 요구조건이 수락되는 대신 히데요시를 일본 왕으로 책봉한다는 조서를 받았다. 일본에는 명이 마치 일본을 인정한 듯 사기를 쳤다. 이는 히데요시가 문맹이라는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벌인 대사기극이었으나 결국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눈치 챈 히데요시에게 걸려 모두 들통나버렸다. 심유경은 명나라 조정에서 참형에 처해졌고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측근들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됐다.

이후 고니시는 다시 조선 전장으로 돌아와 가토의 상륙 정보를 조선 조정에 흘리는 방식으로 반간계를 펼쳤고 이에따라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면서 일본 입장에서는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된다. 그 덕에 다시 중용되게 됐지만 이미 전쟁의 승부는 기운 이후였고 히데요시가 1598년 11월 말 사망해 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히데요시 사후, 일본천하가 다시 혼란에 빠졌을 때는 줄을 잘못서고 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으로 돌아선 가토와 달리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서군이 참패하면서 1600년 처형된다.

처형 당시에도 믿음을 끝까지 고수했다. 카톨릭 신자라고 할복을 하지 않고, 온갖 수모를 겪은 후 참수됐는데 죽기 전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이에야스에게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참수시 불교 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그리스도 교인이다. 어디 불교의 것을 들이대느냐!"라 일갈하며 예수와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완전히 멸문당했고 사위인 요시토시에게 시집갔던 딸 마리아는 이혼당해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으며 아들은 살해됐다. 고니시의 봉토는 그의 평생 숙적이던 가토 소유로 넘어갔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전쟁고아 중 하나를 양녀로 입적한 적이 있는데 오다 쥬리아란 이름을 붙여줬다. 쥬리아는 고니시의 사후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막부의 천주교 박해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 보냈다고 알려져있다. 호기롭게 부산을 밟았던 선봉장의 최후 치고는 매우 비참한 최후였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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