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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잘못 열린 '판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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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으로 원전폭발, 재난영화 '해운대'와 서술 구조 비슷
한수원 실상 외면, 정부 무능 비판 치중 '원전사고 겉핥기'

영화 '판도라'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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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억짜리 블록버스터, 136분 내내 '원전위험'만 주입
밋밋한 인물·가족애 강조·작위적 대사·관계설정도 무리수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재난영화의 구조는 단순하다. 예견된 사고를 막거나 벌어진 사고를 수습한다. 이것만으로도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충무로는 인물들의 희생을 과도하게 조명한다. 신파를 밀어 넣고 어떻게 하면 실감나게 포장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러다보니 사건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나 새로운 비판의식이 자주 결여된다.
지난 7일 개봉한 '판도라'도 다르지 않다. 강진에 이은 원자력 폭발사고를 그렸는데, 관객 1145만3338명을 동원한 '해운대(2009년)'의 서술 구조를 그대로 빌렸다. 다양한 인물들을 인재(人災)에 빠뜨려 예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판박이다. 이야기도 신선하지 않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벌어진 일들을 한데 모았다. 지진으로 인한 원전사고, 사상자를 감추려 하는 정부, 우여곡절 끝에 최악의 상황을 막은 현장 노동자들. 박정우 감독(47)은 이 검증된 레시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래서 155억원을 쏟아 부은 영화가 단지 주의를 환기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핵심을 모른다

판도라의 원전사고에 대한 인식은 1980년대 수준이다. 핵심요소라고 해야 할 국제적인 원자력동맹과 원전이 가진 차별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문제로 지적하지 않을 수도 있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등을 통해 국제 사회가 충분한 교훈을 얻을 때 우리는 군사독재를 탈피하기 위한 민주화 투쟁에 전념해야 했다. 핵 문제는 남의 일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웃나라에서 참사가 벌어진 지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수력원자력에 대한 불신도 점점 증폭되고 있다.
영화 '판도라'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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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속 '한별'은 1986년에 돌아가기 시작한 전남 영광 한빛 1호기를 연상시킨다. 1971년부터 가동된 후쿠시마 원전과 비슷한 위험을 안고 있다. 박 감독은 이 점에 주목한 듯하다. 도쿄전력은 고가의 원전시설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사고 직후 해수 투입 등 대응 조치를 망설였다. 영화는 이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 후쿠시마 원전은 열 시간 이상 냉각수 없이 돌아갔다. 결국 연료 대부분이 녹아떨어지면서 더 큰 참사로 이어졌다. 영화에서 도쿄전력은 대한수력원자력이다. 국가의 이익 운운하며 해수 투입을 꺼린다.

군사 목적이든 전력 생산 목적이든 원자력의 세계는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적인 원자력 동맹이라고나 해야 할 강고한 지배구조에 의해 통치됐다. 이 구조에서 국가 간 경계는 큰 의미가 없다. 궁극적으로 글로벌 자본의 지배를 강화하는데 이바지할 뿐이다. 표면적으로는 상호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인 관계일 수 있어도 적어도 핵문제를 둘러싸고 각국은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로지 국제 원자력 동맹 세력에 의한 지배구조의 강고함은 안전 등의 측면에서 합리성이 인정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과학기술의 성과로 간주돼왔다. 판도라는 이 같은 구조적 문제에 조금도 접근하지 못했다. 대한수력원자력의 실상을 외면하고, 오로지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데 주력한다. 판도라는 원전사고를 단편적으로 바라볼 뿐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영화 '판도라'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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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이 내포한 차별에 대한 인식도 다를 것 없다. 핵발전소를 유지하려면 평상시에도 정상가동을 위해 고위험도의 방사능에 피폭돼가며 원자로 안에서 작업하는 현장 노동자들이 필요하다. 대부분은 사회 최하층 빈민이다. 그들은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한 노동으로 살아간다. 경제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사회에서 이런 노동자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핵발전소나 핵폐기물 처리장은 대부분 소외지역에 건설된다. 전력을 많이 쓰고 번영을 누리는 대도시에는 절대 들어서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원자력이 안전하다는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판도라를 제작한 사람들은 이 차별구조에 기초한 비윤리적인 시스템을 모른다. 그러기에 인물 대부분을 그토록 평범하게 묘사했을 것이다. 원전 덕에 생계를 유지한다며 흐뭇해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박 감독은 극 후반 나라의 안전을 위해 희생을 택하는 재혁(김남길)을 통해 결여된 부분을 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족애 등을 강조한 신파가 그 공간을 메워버렸다.

과유불급

재난영화는 현실과 흡사할수록 경각심을 강하게 환기한다. 그런데 판도라에서 원전은 온갖 불행을 가두어 둔, 안전한 상자일뿐이다. 그렇기에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을 일깨우지 못한다. 영화를 만든 솜씨가 정교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특히 대사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인물들은 일상 대화에서도 밥상의 김치만큼 자주 원전을 들먹거린다. 엄청난 사건을 그리면서 원전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해 주워섬기는 동안 러닝 타임은 136분에 이른다.

영화 '판도라'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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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설정도 매우 평면적이다. 재혁의 어머니인 석여사(김영애)가 대표적이다. 원전사고로 이미 큰 아들을 잃고도 다시 터진 사고 앞에서 안전 불감증을 보인다. 박 감독은 이로 인해 며느리 정혜(문정희)와 빚는 마찰을 영화의 부수적 갈등으로 배치했다. 그는 "우리 부모 세대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기성세대의 답답한 면을 표현했다"고 했다. 글쎄, 의도는 알겠지만 그 표현이 영화 속에서 원하는 만큼 기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김명민)에게 발전소의 안전 관리 문제를 고발하는 소장 평섭(정진영)도 현실 속의 인물은 아니다. 일본을 보자.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국가와 자본의 비윤리적 프로젝트를 거부하기는커녕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비판적 사고가 결핍되어서라기보다는 국가안보나 국익이라는 목적이 우선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그런 인물이 있다 해도 소장까지 맡을 리 만무하다. 1953년 미나마타 공해사건의 과학적 규명에 매달린 우이 쥰은 도쿄대학 이공학부에서 승진의 길이 막혀 '만년 조수'에 그쳤다. '원자력의 거짓말'·'은폐된 원자력 핵의 진실'·'후쿠시마 사고 Q&A' 등을 쓴 고이데 히로아키도 예순여섯 살이 되도록 교토대학 원자로 실험소 조수를 면치 못했다.

영화 '판도라'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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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이경영)가 대통령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설정 또한 무리수다. 차라리 최순실과 같은 비선실세로 묘사했다면 납득이 가지 않았을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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