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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그림, 퀸의 노래가 된, 에드거 앨런 포의 '끝장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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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의 타계일에 돌아보는, 불후의 명시 '큰까마귀'의 거대한 감성충격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폴 고갱의 그림 '네버모어'(1897)

폴 고갱의 그림 '네버모어'(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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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벌거벗고 누워 있다. 이쪽으로 몸을 돌린 채 왼팔을 벋어 뺨을 감싸고 있고 시선은 어떤 상념에 잠긴듯 먼 천정쯤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여인의 뒤쪽으로 또다른 여인 둘이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 거기에다, 열린 창틀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아래쪽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 그림은 폴 고갱(1848-1903)의 타히티 작품 중의 걸작인 '네버모어'이다. 그림의 왼편 위에는 화가가 스스로 써놓은 제목 'NEVERMORE'가 보인다.

여인은 당시 고갱의 연인이었던 타히티 여인 파후라라고 한다. 그녀는 열네 살 때(1896) 고갱과 동거를 시작했고 열다섯에 딸을 낳았지만, 아이는 태어난 뒤 곧 죽었다. '네버모어'는 그 무렵 그린 그림이다. 어린 아내의 절망감과 당시 건강을 잃은 고갱의 정신적 정황을 드러낸다. 1897년은 고갱의 기분이 한없이 다운되어 있던 시절이다. 1893년 파리로 돌아가 타히티에서 건져올린 작품들을 전시했으나 평단의 혹평을 받았고, 가족조차 그를 외면했다. 고독의 벼랑에 내몰린 그는 다시 쫓기듯 타히티로 돌아왔다. 그해가 1895년이었다. 그가 파후라와 결혼하게 되는 건,저 원시의 영혼으로부터 깊이 위로받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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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제목으로 쓰인 '네버모어'는, 미국문학의 걸출한 존재인 에드거 앨런 포(1809-1849)가 남긴 불후의 명시 '큰까마귀(The Raven)'에 나오는 말이다. 이 까마귀는 오직 한 마디 말만 뱉을 줄 안다.

"네버모어!"

이 말의 뜻은 여러 가지로 번역되나, 그 느낌에 가장 근접한 것은 "끝장이야!"가 아닐까 한다. 뭔가를 더 기대하지 말고 단호히 절망의 선을 그어주는 그 말.

포의 까마귀가 뱉은 저 극언은,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일깨운 위대한 한 마디였다. 미국의 포가 없었다면, 프랑스의 보들레르(1821-1867)나 말라르메(1842-1898)도 없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폴 고갱 또한 에드거 앨런 포가 퍼뜨려놓은 그 불길하고 엄혹한 기분에 저항할 수 없이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까마귀 예언자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불멸의 락그룹 퀸.

불멸의 락그룹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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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살고싶지 않아
비는 그치고
이제 더 이상 날 위해 울지마
보이지 않니
내게 제발이라고 속삭이는
바람소리를 들어봐
벼랑의 길로 나를 보내지마
저 골짜기 아래에도
햇살이 비치는 곳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이제 더 성숙한 무엇도 없어
보이지 않니
왜 날 떠나야 했니
왜 날 속여야 했니
벼랑의 길로 나를 보내지마
날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아, 아, 이젠 끝장이야 끝장이라고

There`s no living in my life anymore
The seas have gone dry And the rain`s stopped falling
Please don`t you cry any more
Can`t you see Listen to the breeze
Whisper to me please
Don`t send me to the path of nevermore
Even the valley`s below
Where the rays of the sun were so warm and tender
Now haven`t anything to grow
Can`t you see
Why did you have to leave me (nevermore)
Why did you deceive me (nevermore)
You sent me to the path of nevermore
When you say you didn`t love me anymore
Ah ah
nevermore
nevermore

영국의 불멸의 하드락 그룹 '퀸'은 1974년 떠나가는 연인을 향해 내뱉는 절망적인 한탄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 제목이 '네버모어'였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쩌면 평범해보이기도 하지만 벼랑에서 막 뛰어내리려는 충동의 경계에 서 있는 아슬아슬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단절의 공포가 '네버모어'에 각인되어 있기에, 많은 이들은 이것이 포의 까마귀 언어를 변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인류를 치명적 공포에 빠뜨린 에드거 앨런 포의 장시 '큰까마귀'를 감상할 차례다.

음산한 12월 밤이었다
나는 이야기책을 읽고 있었다
그저 슬픔을 달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귀하고 눈부신 여인은 마침내 떠났고
나는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르노어
이젠 더 이상 부르지 못할 이름

책을 읽다가 어느새 졸음에 빠졌을 때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똑똑

가볍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냥 누가 찾아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일 뿐이야."
이렇게 혼잣말을 했지만
처음 느끼는 알 수 없는 공포가
나를 휩싸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용서해주오.
사실 좀 졸고 있었거든요.
내가 잘못 들었나 했소."

그리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문밖에는
어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두렵고 의심스런 마음으로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참 서 있었지만 정적은 계속 되었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그때 들려온 오직 한 마디.
"르노어?"

그건 내가 뱉은 말일 뿐이었다.
뒤어이 되돌아온 말도 같았다.
"르노어"
누군가의 대답이 아니라
메아리였을 뿐.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왔을 때
다시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먼저보다 조금 더 큰 소리였다.
덧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퍼덕이는 소리,
뭔가가 날아들어왔다.

까마귀.

그것은 멈추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왕이나 귀부인같은 모습으로
문 위에 앉았다.

"밤의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소름끼치는 까마귀야.
밤이 다스리는 저승에서 너를 무엇이라 부르느냐
당당한 이름을 말해보라."

나의 말에 까마귀는 대답했다.

"끝장이야!(Nevermore)!"

고갱의 그림, 퀸의 노래가 된, 에드거 앨런 포의 '끝장 까마귀' 원본보기 아이콘



이 흉칙한 새의 대답은 의미가 없었다.
내 질문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뚜렷한 말소리에 놀랐다.

새의 이름이
"끝장"이라니.

깃털 하나 퍼덕이지 않은 채
그 말 한 마디만 되뇌는 까마귀를 보며
난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떠났어.
내일이면 새도 떠나겠지.
희망이 모두 가버렸듯이."

새는 또 대답했다.

"끝장이야."

섬뜩하고 불길한 이 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새가 왜 그런 소리로 우는지
이유를 생각하다가 소리쳤다.

"르노어 생각을 잠시 멈추라고
그녀를 잊으라고
하느님이 천사를 시켜 널 보냈구나.
슬픔을 쫓아내고
르노어, 그녀를 잊으리라."

까마귀가 말했다.

"끝장이야!"

나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슬픔으로 괴로워하는 이 영혼에게 말해다오.
머나먼 에덴에 가면 르노어
그녀와 포옹할 수 있는지 말해다오."

까마귀는 변함없이
말했다.

'끝장이야!"

나는 벌떡 일어서며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폭풍우 속으로
밤이 다스리는 저승으로 돌아가라.
이 고독을 깨지말고 날 내버려두라."

까마귀는 또
"끝장이야"

그 말만 반복할 뿐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번득이는 두 눈이
악마의 눈 같았다.

문 위의 등불은
바닥에 까마귀 그림자를 흘려놓았다.
내 영혼은 방바닥에 꼼짝 않고 떠 있는
그 그림자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리라.

끝장이야

에드가 앨런 포의 '큰까마귀(The Raven)'

이 시에 나오는 까마귀를 한국의 많은 번역자들은 '갈가마귀'라고 했다. 영어의 'Raven'은 큰까마귀를 가리키며 이것은 갈가마귀와 전혀 다른 종류다. 이 새는 몸집이 크고 잡식성이며 쥐 따위를 사냥해 먹기도 하고, 순록같은 것의 시체를 뜯어먹는다. 너무 커서 먹이를 이동하기가 힘들면 다른 동물이 뜯어 헤쳐놓기를 기다렸다가 나머지를 발라먹는 '청소동물'이기도 하다. 이 까마귀는 줄묶인 횃대 끝에 있는 고기조각을 먹기 위해 줄을 조금씩 잡아당기는 장치를 이용할 줄 아는 정도의 지능과 학습능력을 지녔다. 또 고기를 땅에 묻어놓기도 하는데, 다른 까마귀를 속이기 위해 묻지도 않았으면서 묻은 것처럼 기만작전을 쓰기도 할 정도이다.

썩은 고기를 뜯어먹고 사는 이 검은 날짐승을, 유럽인들은 오래전부터 불길함과 죽음의 상징으로 여겼다. 덴마크 민담에선 까마귀가 왕의 심장을 빼먹고 인간의 지식을 갖게되는 스토리가 있다. 까마귀의 지능에 대한 불안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찰스 디킨즈의 작품에도 이 큰까마귀가 등장한다. 톨킨과 스티븐 킹도 이 까마귀를 이야기 속에 데려왔다.

포의 '큰까마귀'는 그가 36세 때인 1845년 1월 '뉴욕 이브닝 미러'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세 권의 시집을 이미 냈지만 전혀 주목받지 못하자 낙담하여 14년간 그는 작품을 내지 않았다. 이 작품은 오랜 공백을 깨고 낸 것이었는데 뜻밖에 주목을 받게 됐다.

까마귀가 '네버모어'라고 운다는 설정은, 그의 환청일수도 있고 경험에 기반한 것일수도 있지만 저 까마귀의 단호하고 날카로운 '네버모어'가 시행을 따라다니며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앞의 말을 강하게 추인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시의 매력이다. 네버모어는 까마귀의 울음이기도 하지만, 그의 내면에 날아와 앉은 음울한 죽음과 절망의 영감이 그에게 내뱉는 참혹한 독설이기도 하다. 까마귀 그림자와 자신의 영혼이 합체되고, 그것이 네버모어를 내뱉으면서, 사랑에 절망한 한 영혼을 부동자세로 세워놓는다.

이 까마귀가 포의 삶을 바꿔놓긴 했지만, 행운은 그리 길지 않았다. 2년뒤인 1947년 아내 버지니아가 폐결핵으로 숨졌고 이듬해인 1948년 2월 그는 뉴욕의 한 도서관에서 '우주의 현재 상황'이라는 기묘한 제목의 강연을 기획했으나 기대했던 청중들이 몰려오지 않았다. 강연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찾아가 "나의 발견은 뉴턴의 중력발견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고 주장했으나 책은 별로 팔리지 않았다. 당시 포의 작품은 미국을 품미했던 청교도적인 사상과는 전혀 달랐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좋아하는 미국인의 기본 기질과도 맞지 않는, 포의 기이하고 탁월한 낭만주의는 시대와 나라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 프랑스에서 생겨났다. 프랑스 상징주의는 포의 까마귀 그림자 속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보들레르나 말라르메는 포가 없었으면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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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환상에서 피어난 미학과 병적인 집착에서 터져오른 새로움과 놀라운 언어센스에서 빚어진 음악적인 시행들의 중독성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발견한 것은 그가 죽고난 뒤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의 예술은 당대의 '끝장'이었지만, 이후 인류에게는 어떤 시작이었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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