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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영의 청경우독(晴耕雨讀)]'또라이'들 속에서 발견한 혁신이라는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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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해커·갱단…낡은 시스템을 재구성한 비주류의 반란

- 선장선출·평등발언·임금체계 등 해적시스템 민주주의 이상 완벽 구현
- 극단적 빈곤 탈출 넘어 '해적산업'으로 확장
- 괴짜들의 삶에서 찾아낸 혁실의 필요조건 탐색

[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소말리아 해적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대규모 무역을 하는 기업에 공공의 적이었다. 소말리아 해적은 한국의 청해진부대가 소말리아 해역인 아덴만에서 피랍된 삼호해운 소속 삼호주얼리호를 구출한 이른바 '아덴만(Aden bay) 여명작전'으로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존재.

이 해적들은 2011년 한 해에만 민간 화물선 등을 237차례나 공격했다. 피해 규모를 정확히 추산하기 어렵지만 국제해사국(International Maritime Bureau) 집계에 따르면 최대 100억달러를 훨씬 웃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화로 환산하면 11조원이 넘는 액수다. 다행히 지난해에는 수년간 계속된 연합국의 소탕작전 덕에 처음으로 소말리아 해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선박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소탕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해적이 '또라이들의 시대(원제: The misfit economy)'라는 책에 돌연 '혁신'의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저자들의 궁금증은 변변치 않은 장비와 무기로 작게는 수천t 크게는 수만t에 달하는 화물선을 어떻게 일 년에 수백 번씩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는지, 크고 작은 소탕작전에도 20년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인지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들은 '해적=또라이=혁신'을 등치시키기는 했지만, 해적 행위를 두둔하거나 옹호하는 게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저자들은 해적이 대대로 전통적인 규범과 기존의 시스템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롭게 재구성했던 것에 주목했다. 시간을 거슬러, 철저한 신분과 계급의 시대에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수직적 체계를 과감하게 깬 18세기 해적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오늘날보다 더 완벽한 민주주의 시스템"이었다고 평가했다.

저자들이 주목한 18세기 해적의 시스템은 무엇이었을까. 해적들은 해적선을 지휘할 선장을 직접 선출했다. 선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선원들은 언제든지 선장을 갈아치울 수도 있었다. 해적선 내 권력 분산을 위해 선원에 대한 보상과 처벌을 맡는 '갑판수'라는 직책도 따로 두고 별도의 견제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었다. 전투 상황을 제외하고 선원들이 언제든지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바살러뮤 로버츠(블랙 바트)가 이끌던 해적선의 헌법(?) 1조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은 동등한 투표권을 가진다'로 시작했다.
18세기는 다름 아닌 '절대왕정' 시대였다. "영국 왕이 권리 장전에 서명하기 10년 전, 대륙 회의가 독립 선언문에 서명하기 1세기 전, 그리고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비슷한 법이 제정되기 150여년 전 이미 바다 위의 해적들은 민주적 통치방식을 채택했다." 경제학자 피터 T.리슨이 저서 '후크선장의 보이지 않는 손: 해적의 숨은 경제학'에서 내린 평가다.

나아가 해적의 분배 시스템은 동등한 임금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물질적 불평등이 신뢰의 붕괴로 이어지고 공동의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에 따라 최대한 동등한 보상을 통해 선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한편 약탈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시스템으로 가장 악명 높았던 바살러뮤 로버츠가 이끈 해적은 18세기 유럽의 해상무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1715년부터 1728년까지 수백 척의 상선을 공격했다. 이 시기 영국 해상무역의 성장률은 '0(제로)'였다.

저자들이 소개하는 소말리아 해적의 탄생 스토리도 18세기 해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나긴 내전으로 인한 결핍과 무정부 상태인 소말리아 해역에서 무단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들에 대한 불만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구가 시발점이 됐다. 무엇보다 강대국들이 주도하고 있는 주류시장에 진입해 먹고살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1990년대 이 같은 배경으로 탄생한 소말리아 해적은 새로운 세기를 맞아 대형 어선을 모선으로 개조해 먼바다에 띄우고, 정보원이 물어온 정보를 바탕으로 대형 화물선을 나포해 해운사나 정부와 몸값 협상을 벌이는 단계로 진화하기에 이르렀다. 해적 조직 내에는 변호사를 비롯해 위폐감별사, 군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주류에 도전하는 위험천만한 일인 만큼 수익도 짭짤했다. 소말리아 해적은 몸값을 받아 기여도에 따라 배분했고 말단에 있는 해적들도 원화로 월 100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소말리아 국민의 연평균 소득이 5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매달 일반 사람들의 2년치 소득을 챙겨간 것이다. 덕분에 해적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시장이 만들어졌고 일부는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얻었다. 주류시장에 한해 10조원이 넘는 피해를 미치는 해적 사업이 소말리아에서는 가장 유망한 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사실 해적이 비주류의 혁신을 이야기하는 이 책의 주된 소재는 아니다. 저자들은 해적에 이어 해커, 갱단, 거리 예술가, 사회 운동가 등 비주류 경제권에 속해 자신만의 방업으로 세상을 바꾼 이들에 주목하고 혁신의 요건을 허슬(hustle), 복제, 해킹, 도발, 방향전환(pivot) 등으로 요약했다. 책에는 엄격하게 수입이 금지된 낙타유 사업을 시작해 성공한 미국 명문 MBA 졸업생의 이야기를 비롯해 짝퉁 이베이(e-bay)를 설립해 100일 만에 진짜 이베이에 500억원에 팔아넘긴 독일의 괴짜 삼 형제, 가짜 WTO 사이트를 만든 '예스맨'이라는 활동가 그룹 등 30여가지 사례와 인터뷰가 담겼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소재의 신선함과 풍부한 사례에 비해 이 같은 비주류의 혁신에 공감할 만한 논리는 미약하다. 무엇보다 위대한 기업이 전파하는 혁신이 지겨워 '또라이'들의 성공스토리를 담았다지만 소재를 빼고는 크게 차이가 없다. 일론 머스크,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의 이야기가 해적, 해커로 치환됐다는 인상이 짙다. 해적과 해커를 잇는 연결고리도 애플 본사의 '해적 깃발' '해커 방식'이라는 페이스북의 독특한 경영 방식에서 찾는다. 더욱이 저자들이 말하는 30여가지의 사례가 "보통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라고 하기엔 지겹다던 '위대한 기업'만큼이나 보통 사람들에게는 극단적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 시장시스템의 근간인 효율성, 표준화, 생산성 등에 염증을 느끼고 포스트(post) 신분제 사회 안에서 비주류의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면 흥미롭게 읽어 볼만은 하다. 깊이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글쓴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알렉사 클레이와 가디언 기자 출신 키라 마야 필립스다.
또라이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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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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