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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해장국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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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그렇게 퍼 마셨나. 이런 후회로 가득 차 더 쓰린 배를 부여잡고 출근길에 오른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것의 고마움을. 자꾸 신물만 올라와 더부룩한 속을 달래줄 해장국 한 그릇 말이다. 이른 아침 집에서 타박 잔뜩 듣더라도 콩나물국이나마 얻어먹었으면 생각이 덜 난다. 하지만 불콰하게 취해 느지막이 들어간 게 잔뜩 면구스러운 마당에 흔들어 깨워 아침을 청하는 것은 언감생심. 자취 경력이 몇 년인데 스스로 차려 먹어야지 싶다가도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님의 새벽 단잠 깨우면 어쩌나 숨죽여 나온 처지라면 더욱 간절하다.

 술 마신 다음 날은 대개 1분이라도 더 자겠다는 생각이 앞서 출근 시간을 맞추기도 빠듯하다. 일찍이 집을 나서 업무 시작 전 회사 근처 해장국집에 하루의 시작을 의탁할 수 있다면 제법 운수 좋은 날이다. 새벽녘부터 큰 무쇠 가마솥에 뭔가 끓이는 가게 안을 살피며 혼자인 게 멋쩍어 쭈뼛거리는 것도 잠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 왠지 따뜻한 안도감이 먼저 든다. 어젯밤 일을 차분히 복기하면 짙은 후회가 앞서지만 무엇을 끓여 냈건 곧 받아 들 허옇게 김 올라오는 뚝배기 한 그릇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비록 세파에 휘둘려 어젯밤 꽤나 스스로를 혹사했지만 이렇게 살아남아 꿋꿋이 한 수저 뜬다고 생각하면 자못 비장해지기도 한다. 주위를 둘러봐도 그것이 술이건, 일이건 그 고단함을 떨치기 위해 허겁지겁 볼 미어지게 숟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뿐이다.
 해장국의 이런 정서는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본디 이 음식은 힘든 노동을 감내하는 서민들의 삶과 그것을 견디기 위한 한잔 술의 다음에 놓인다. 서울서 해장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청진동 일대는 한 세기 전 나무시장이 서던 자리였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고관들의 말과 마차를 피해 백성들이 다녔다고 해서 '피맛골'로 불렸다. 일꾼들이 거친 숨 몰아쉬며 집채만 한 나뭇짐 내려놓고 탁배기 한 사발로 목 축인 뒤 그 취기 달래기 위해 해장국 한 숟가락 입에 넣는 광경이 절로 그려진다. 그의 고단한 삶에 그 한 그릇보다 더한 위안이 있었을까 싶어 먹먹하다가도 고작 위안을 얻을 게 해장국 밖에 없었을까 싶어 막막하다.
 그렇다고 서린 게 땀내뿐이라고 여기면 해장국 입장에선 섭섭하다. 우리 민족의 문화 고스란히 배어 든 음식인데 맛이 빠질 수 없다. 이달 초 여름휴가 첫 날 아침에 찾은 장위동의 해장국집에서 그 맛을 느꼈다. 소뼈, 선지, 우거지 등에 된장 양념 더해 끓인 한 그릇의 포만감을 즐기고 있는데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들어왔다. 가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주문 뒤 주인장에게 이전할 계획 있으면 꼭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국 어디로 가든 따라다니며 먹겠노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호기롭게 값을 치르며 생각할 수밖에. 전국을 따라다니며 먹는 해장국의 맛이라니.

 하지만 맛만으로 해장국을 찾을 수 없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장국과 삶의 무게는 떼려야 뗄 수 없다. 해장국의 원래 이름은 숙취를 풀어준다는 해정(解酊)국이지만 이제는 답답한 속을 풀어준다는 해장(解腸)국으로 이해된다. 저간에 벌어지는 일들, 신문 지면을 장식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죄다 서민들 맺히게 하는 것들뿐이니 맛보다는 그저 해장이 절실한 시대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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