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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값, 꼴값, 나잇값, 밥값, 떡값, 똥값의 숨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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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낱말의습격'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서양의 인식론을 압축한 듯한 심오한 표현이다.

물(物)의 격(格)을 찾아줌으로써 지(知)에 이른다. 칸트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외물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발견했다. 갓난 아이를 옆에 두고 잠든 어머니는, 아이가 내는 소리는 아주 사소한 소리라도 금방 듣지만 다른 소리는 아무리 커도 듣지 못한다. 잠결에서도 소리를 구별하여 듣는 것이다. 이것이 인식론에서 말하는 범주(카테고리) 개념의 핵심이다.
물의 격이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그것을 범주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소리를 듣기 전에 귀는 이미 듣고자 하는 소리의 범주를 이미 정해놓은 것이다. 물론 이 범주를 깨는 비상 인식체계 또한 존재하지만, 여기선 일상적인 감각 처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정해진 소리의 범주를 따져보면 그것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것이 격물치지이다.

격물에 해당하는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값’이라는 한 글자에 주목한다. 값이라는 말은 사물에게 매겨지는 평가를 의미하며, 그 평가가 보편적일 때 그 값은 사회적으로 통용된다. 많은 물건에 붙어있는 ‘가격(價格)’은 우리의 인식 체계 속에 있는 ‘값’의 감각을 격물화(格物化)한 것이다. 값(價)에 격(格)이 붙어있는 것을 주목하라.

꽃값, 꼴값, 나잇값, 밥값, 떡값, 똥값의 숨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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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값’이라는 말이 있다. 사물이 지녀야할 정당한 값이 제 값이다. 스스로가 가진 값이 제 값이다. 제 값을 받지 못하는 상황은 사회의 어떤 시스템이 (비록 미세할 수는 있어도) 고장이 나있는 것이다.

몸값이라는 말은 있으나 마음값이란 말은 없다. 몸은 사물로서 값어치를 견적을 낼 수 있으나 마음은 그러기 어렵다. 진짜 몸값은 옛날 노예 시대에 인신을 사고파는 시장에서 매겨지는 값이겠으나, 요즘의 몸값은 상징적인 값이다. 몸이 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능과 능력과 수고를 값으로 매긴 것이다. 대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이나 스타들의 개런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음지에서는, 술집 여성들이나 창녀들이 잠자리를 하는 값을 의미한다. 이것이 왜 몸값이냐 하면, 여성의 ‘몸’은 그 성기로 함축되기도 하며, 그 성기의 개방을 허용하는 행위 자체를 지칭하기도 하는 완곡어이기 때문이다. 몸값은 꽃값이나 해웃값이란 말로 쓰이기도 한다.

몸값이 비슷해보이는 꼴값이라는 말이 있으나, 상당히 다른 말이다. 꼴이란 생김새를 말한다. 생김새에 걸맞는 혹은 상응하는 값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꼴은 대개 그리 볼 만 하지 않은 불량한 형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꼴값은, 그 꼴이라면 그 정도로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인데, 자기 값을 넘어서 행동하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꼴값을 떤다’는 것은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서 오버하는 행위를 ‘경련하는 행위’에 비유한 것이다.

얼굴값이란 말도 있는데 이것은 좀 다르다. 아까는 못난 것이 잘난 척을 하는 게 문제이지만, 이번엔 잘난 것이 그 잘난 값을 채우느라 유난을 떠는 바람에 드는 옆사람의 피로와 수고를 함의하는 말이다. ‘얼굴값을 한다’는 건 바로 그런 뜻이다. 이런 표현에는 반드시 오래된 미립과 통찰이 있다. 높은 값이 매겨지는 얼굴을 지닌 사람은, 그것을 자기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삶을 살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위값’과는 다르게 떠받들고 높이 평가하는 경우를 만나다 보면 자기 평가에 후해지고, 그래서 얼굴값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만들어내기 쉽다.

나잇값이란 말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 거기에 걸맞는 언행을 해야 하지만 살아보면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주로 훈계하거나 비평하는 용도로 이 말을 쓴다. 나잇값을 못하는 것은 대개 그 연륜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를 말함이다. 나이보다 늙은이 행동을 하는 것을 나잇값을 못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나이의 값은 나이가 들수록 더 올라가야 한다는 의미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서른 살보다는 마흔 살이 더 비싼 나이다. 마흔 살보다는 환갑 나이가 더 비싼 나이가 된다. 나잇값이란 말은 장유유서 시대의 잔재임에 틀림없다. 어른과 노인이 진심으로 대접받고 존경받던 사회에는, 나잇값이 의미있는 말이었다.

요즘 나잇값은 거꾸로인지 모른다. 나이가 들 수록 나잇값은 디스카운트되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이니, 이젠 나잇값을 못하는 게 진짜 제대로 사는 것이란 역설적인 주장도 나온다. 늙었다고 늙은 티를 내는 것은 어리석다는 나름의 현실적인 처세방식이다.

밥값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죽값이나 국값이나 빵값은 없어도 밥값은 있다. 밥값을 한다는 것은 제 몫의 일을 한다는 것이다. 밥이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고 대표적인 ‘에너지원’이다. 그 에너지원을 섭취한 것에 상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밥값이다. 밥값을 못하는 것은 타인에게도 빈축을 사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무척 위축되고 괴롭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밥값을 하느냐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윳값이란 말이 있다. 이건 좀 다르다. 우유는 어린 아이에게 먹이는 기초 음식이다. 우윳값을 댄다는 것은 아이를 부양하는 최소한의 비용을 말한다. 우유값을 벌기 위해서 출근한다는 말이 눈물겨운 것은 그 때문이다. 삶의 여유가 바닥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윳값도 댈 수 없는 사회는, 이미 미래를 위한 부양능력이 마비된 사회이다.

떡값이라는 말은 매우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명절날 떡을 하라고 주는 값이라고 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떡을 치는데 그 돈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떡을 치는 대신에 떡고물을 챙기는 관행이 떡값이다.

요즘은 차를 타고 다니니 떡값 대신에 기름값이란 이름으로 주기도 한다. 자동차 기름이나 인간의 뱃속에 끼는 기름이나, 혹은 인간을 움직이는 휘발유나 모두 기름값의 함의를 돋운다.

먹는 것의 후속편에도 값은 있다. 똥값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똥값은 똥의 가격을 말하지만 대개 그런 의미로 쓰이지 않고 거의 공짜에 가까운 헐값을 말하는데 쓰인다. 지난 시대 인분(人糞)의 활용은 매우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저 적절히 잘 분해해서 버리는 것에 중점을 둔다. 먹는 것은 값을 높이 치고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이 몸 속에서 쓰임새를 다하고 나오는 순간의 값은 그야 말로 똥값이 된다. 휴대폰이 똥값이라고 써놓은 큰 현수막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표현을 찾는 광고의 센스이겠지만, 항문에 컨베이어벨트가 설치되고 거기 휴대폰이 밀려나오는 이미지를 자꾸 떠오르게 한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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