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마지막 함께 해, 영화 ‘울지마 톤즈’에 촬영장면 삽입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겨울이 오기전에 톤즈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렵다”는 의사의 말에 난감해하던 이 신부는 오히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단 아이들과 후원자들에게 미안하다며 홍 부장에게 이렇게 말을 전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 신부를 떠나 보낸 홍 부장은 그 때 그의 표정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단다.
홍 부장이 이 신부를 알게 된 것은 2003년 방영된 KBS의 ‘한민족 리포트’를 통해서였다. 이 신부는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광주 가톨릭대를 거쳐 살레시오회에 입회에 2001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수단으로 파견돼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가겠다”고 답했는데, 1년 뒤인 2007년 홍 부장은 정말로 톤즈로 가게 됐다. 남북으로 나뉘어 내전 중이던 수단에 들어서기 위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를 통해 북부수단 카르툼에 들어간 뒤 가톨릭 선교사 신분으로 위장해 경비행기를 4시간이나 타고 날아간 끝에 남부 와우로 날아갔다. 공항에는 이 신부가 마중을 나와 있었고, “여기가 어디라고 이곳까지 찾아왔느냐”며 반갑게 홍 부장을 안아줬다.
이 신부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톤즈는 말 그대로 불모지 였다. 40도가 넘는 고열 속에 우기만 되면 습지로, 건기에는 땅이 갈라지는 그곳에서 이 신부는 새벽에는 가톨릭 사제, 아침이면 의사와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 점심때는 학교를 짓는 벽돌공, 저녁이면 브라스밴드 지휘자와 음악선생님, 밤이 되면 다시 응급실 의사가 돼 병원으로 불려가는 일상을 8년 여간 버텼다.
선교사로서 의사로서의 봉사활동도 어려운데 선생님 역할까지 자임한 이유는 “교육만이 수단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이 신부의 소신 때문이었단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만 이 아이들이 커서 아프리카가 달라지게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이 신부는 학교를 짓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현지 상황이 워낙 열악했던 탓에 자재를 공급받기가 쉽지 않았다. 마을 주민, 아이들과 직접 벽돌을 만들고, 망고나무 서까래를 올려 건물을 지어야만 했다. 홍 부장이 촬영을 위해 온지 일주일이 지나서는 쌀이 떨어져 먹을 것이라고는 뒤뜰의 토마토가 전부였다. 홍 부장이 보기에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원주민이 아니라 이 신부 자신이었다.
2008년 왕복표를 끊어 서울로 왔다가 병명을 알게 된 이 신부는 고통스러운 항암제 투여를 견뎌내며 다시 톤즈로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았단다. 그 해 자랑스러운 의사로 선정되자 이 신부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병세는 악화됐다.
영면 하루 전 홍 부장이 병실을 찾아갔을 때 침대에 잠시 앉아 있던 이 신부는 “서울의 야경을 보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이 신부의 감동적인 삶을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 엔딩 크레딧에는 ‘촬영 두산 홍진기’라는 이름이 들어있다. 이 신부와의 인연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한 홍 부장이 수단 현지에서 촬영한 장면을 기꺼이 영화 제작을 위해 내놓았다.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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