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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백제의 운명을 가른 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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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엽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다툼이 치열해졌다. 이 시기 한강유역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고, 백제와 신라는 국력을 키워 호시탐탐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국내 정치가 혼란했고, 대외적으로는 북제(北齊)와 돌궐(突厥)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 틈을 타 백제와 신라는 연합해 한강유역으로 진출했다.

551년 백제는 경기도 일대인 한강하류 지역을, 신라는 강원도 일대인 한강상류 지역을 차지했다. 경기도에서 강원도까지 내려와 있던 고구려의 국경선을 그대로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북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바로 턱 밑까지 치고 올라온 백제를 경계해야만 했다.
그런데 553년이 되면 신라가 한강유역 전체를 장악한다. 예부터 한강하류 일대는 정치ㆍ경제ㆍ문화적으로 한반도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한강유역은 신라가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곳이었다. 원래 한강하류 지역은 백제 왕조의 출발지였다. 그런 곳을 백제가 너무 손쉽게 신라에게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특이한 것은 당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투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한강유역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가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가 한강유역을 독점하면서 북쪽에서 고구려, 서쪽에서 백제, 바다 남쪽에서 왜의 압박이 가해졌다. 또 신라는 한강유역과 동북방지역을 차지하면서 영토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로 인해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에 도달했고, 보급로 확보와 병력 수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동북방지역은 일부 포기하고 한강유역만 제대로 유지했다. 이마저도 신라의 역량으로는 유지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를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몰래 고구려와 연화(連和)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볼 때 신라의 한강유역 독점에 대한 최대 수혜자는 백제였다. 백제의 한강유역 포기는 신라의 과도한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국경선 방어 약화를 초래했다. 또 고구려와의 국경선은 고스란히 신라에게 떠넘겨 버렸다. 백제가 의도적으로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내주었다고 본다면, 신라는 독이 든 술잔을 마신 꼴이 된다.
백제가 신라의 과도하게 신장되어 약화된 중앙 방어선에 쐐기를 박는다면 어떻게 될까? 충북지역이 관건이었다. 즉 백제가 한강유역과 신라 원영토 사이를 갈라치면 신라는 한강유역도 원영토도 지키기 어렵게 된다. 554년 백제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해 충북 옥천의 관산성을 공격했다. 바로 삼국의 운명을 가른 관산성 전투다.

백제와 신라 모두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기는 쪽이 한반도 남부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초반 승기는 병력을 집중 운용한 백제가 잡았다. 신라군의 각간(角干) 우덕과 이찬(伊?) 탐지 등이 백제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이에 신라는 한강유역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동원해야만 했다. 신주(新州)의 군주(軍主)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이진 못했다.

이때 양국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백제의 국왕인 성왕이 직접 전투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관산성으로 향했다. 백제 국왕이 호위병 50명만 거느린 채 관산성으로 다가왔다. 호위병이 적었던 이유는 백제가 이미 장악한 지역이었고, 야간에 이동했기 때문이라 풀이된다. 하지만 백제 국왕의 이동 정보가 신라군에게 새어나갔다. 신라군은 이동로 곳곳에 매복하고 기다렸다. 성왕의 일행이 나타나자 맹렬히 공격했고, 결국 성왕은 복병에 의해 사망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을 죽인 인물은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다. 삼년산군은 현재 충북 보은군 일대이며, 고간은 외위(外位)로서 경위(京位)의 급찬(級飡ㆍ9등)에 해당한다. 백제 국왕을 참수한 인물치고는 상당히 낮은 지위라 할 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 성왕을 죽인 인물이 고도(苦都)라고 되어 있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에게 말하기를 '고도는 천한 노(奴)이다. 명왕(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려 한다.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정황상 도도와 고도를 동일 인물로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도도는 고간이라는 관등을 지닌 지배층이며, 일본서기의 고도는 말 먹이를 주는 노비 즉 사마노(飼馬奴)였다. 좌지촌이라는 출신지역과 사마노라는 노비직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곡지라는 또다른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일본서기의 내용은 신빙성 높은 기록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도도와 고도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삼년산군 아래에 좌지촌이 존재했고, 고간 도도 휘하에 사마노 고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는 군공을 대표할 수 있는 장수 이름을 앞세웠고, 일본서기는 치욕적인 노비 이름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사마노 고도는 주인의 말을 관리하기 위해 주변 일대의 지형과 식생 파악에 뛰어났음에 분명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는 백제 성왕(명왕)을 사로잡기 전에 이미 고도로 하여금 죽이게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신라는 어떻게 고도로 하여금 백제 성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 점이 의문의 시작이자 실마리다. 삼년산군 좌지촌 출신의 사마노 고도는 충북 지역의 지형을 숙지하고 있었다. 신라는 의도적으로 고도를 백제 성왕의 진출로에 노출시켜, 포로로 잡히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 성왕은 현지 주민을 향도(嚮導)로 삼아 안전하고 빠른 지름길을 안내받았다. 하지만 그 길에는 삼년산군의 도도가 이끄는 신라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고도의 또다른 이름이 곡지(谷智)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도는 백제 성왕 일행을 신라군이 매복하고 있는 골짜기로 유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매복도 좁은 골짜기를 이용해야 포위가 쉬운 법이다.

신라가 계획한 대로 백제 성왕이 포로로 잡히자, 고도로 하여금 목을 베게 했다. 백제 국왕이 사망하자 백제군은 급속히 무너졌다. 백제의 좌평(佐平) 4명과 군사 2만9600명이 죽임을 당했다. 신라의 전과가 일부 과장되었다고 보더라도 국왕을 비롯하여 최고 관등인 좌평 네 명과 수만명이 패몰했다. 분명한 참패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사망하면서 백제의 신라 공격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사이 신라는 한강유역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고, 중국과의 교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최약체였던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함으로써, 이제 고구려나 백제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되었다.

554년 성왕의 사망으로 백제의 큰 그림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차츰 국력을 회복한 백제는 의자왕대 적극적으로 신라 공략을 추진했다. 642년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해 옛 가야지역 대부분을 빼앗았다. 결국 위기를 느낀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어 난국을 타계하고자 했다. 백제와 신라의 치고받는 대결은 660년 백제 멸망까지 이어졌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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