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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고소한 마가린에 담긴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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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 과학저술가

김병민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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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맛은 혀로 느끼지만 뇌에서 인지하고 그 맛을 느낀 장면과 함께 기억합니다. 저는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유제품이 가득한 매대 앞에서 발을 멈추고 오래된 기억을 살포시 꺼냅니다.


"맛이 어찡가 모르겄다! 또작또작 맛나게 비볐응께 싸게 묵고 학교 가야지!"


어린 시절 할머니 손길에 억지로 아침 밥상에 앉으며 들었던 말입니다. 매일 아침 할머니는 갓 지은 쌀밥에 마가린을 올리고 노란 덩어리가 힘없이 녹아내리면 그 위에 달걀을 얹고 간장에 싹싹 비벼주셨습니다. 자다 일어나 혀는 깔깔했어도 밥 위에 김치를 얹어 입에 넣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맛에 한 그릇을 후딱 비웠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본적인 맛이 있습니다. 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이 그것이지요. 그리고 맵거나 고소하거나 떫거나 아린 보조적 맛이 있고, 나머지는 보통 맛이라고 착각하는 향을 후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맛 가운데 어릴 적 먹었던 마가린 비빔밥은 좋은 맛들의 집합체입니다. 쌀밥은 탄수화물의 단맛이 났고 달걀은 단백질의 감칠맛이 있습니다. 간장은 소금의 짠맛과 핵산의 감칠맛이며, 비빔밥의 주된 맛인 고소함은 마가린의 지방 때문입니다.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입니다. 기억은 그 시절의 맛까지 꼼꼼하게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마트의 유제품 판매대에는 저의 소중한 추억이 여러 종류의 버터와 치즈에 밀려 구석에 있더군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마가린이 동물성 지방인 버터보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고, 그래서 값싸고 맛좋은 마가린보다 비싼 버터를 선호합니다. 식품회사도 마가린이란 이름을 감추려고 식물성 버터라는 옷을 입혔습니다. 건강 정보는 매체를 타고 사람들에게 급격히 퍼집니다. 과학을 모르시는 필자의 어머니도 포화지방인 소고기보다 불포화 지방인 돼지나 오리고기가 좋다고 알고 있으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마가린이나 튀김에 사용하는 쇼트닝이 몸에 좋지 않은 트랜스지방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과연 포화지방과 트랜스지방은 악이고 불포화 지방은 선일까요? 오늘은 그 오해와 진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포화, 불포화, 트랜스는 모두 화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포화와 불포화는 단어 자체가 무엇인가에 꽉 차 있거나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탄화수소의 구조를 구별하기 위해 쓰는 용어입니다. 수소 원자가 가득 차 있나 아닌가의 구별이고, 지방이 탄화수소 분자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씁니다. 정확하게는 지방이 아니라 지방 분자 안에 있는 지방산에 이 용어를 붙여야 맞습니다. 지방은 어떤 모양일까요? 나이가 40대 이상이라면 집에서 연료로 썼던 프로판가스를 기억할 겁니다. 세 개의 탄소가 사슬처럼 연결된 뼈대에 수소가 탄소 주변에 결합한 탄화수소 화합물이 프로판입니다. 이 프로판이 변형된 분자가 글리세롤인데 모든 지방의 모양은 이 글리세롤에 지방산 세 가닥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방산도 탄화수소 분자이지요. 기다랗게 수십 개의 탄소가 연결돼 있고 탄소 주변에 수소가 붙어있습니다. 결국 지방은 마치 발이 세 개가 달린 해파리가 엉켜있는 모양이고, 이런 구조 때문에 미끈거립니다. 탄소가 가득한 지방은 결국 자동차를 움직이는 기름이나 양초를 태울 수 있는 파라핀처럼 연료로 사용하는 화합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지방을 섭취해 에너지를 얻습니다. 고기를 먹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힘이 납니다.

그런데 이 지방산의 모습이 조금씩 다릅니다. 탄소끼리 단일 결합으로 긴 사슬을 이루면 탄소 주변으로 수소가 두 개씩 결합할 수가 있는데, 이 모습은 마치 다리가 여럿 달린 곤충인 지네와 같은 모습이지요. 이 모양이 수소가 꽉 채워진 포화 지방산입니다. 그러면 불포화는 지네 다리가 부족하다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수소가 덜 붙어 있습니다. 탄소의 긴 사슬 사이 일부가 이중결합으로 연결돼 있으면 그만큼 수소가 결합할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떤 성질이 있기에 '좋다, 나쁘다'의 기준이 됐을까요? 수소가 모자라면 좋은 것일까요?


지방산의 모양을 더 자세히 봅니다. 포화한 경우에 곧게 뻗어 있지만, 불포화된 경우에 수소가 부족한 부분에서 전자기력 때문에 분자 모양이 휘어집니다. 이 모양으로 지방의 운명이 갈리게 됩니다. 그런데 꺾인 모양도 조금 다릅니다. 완전히 꺾인 모양인 시스 구조가 있고 약간 뒤틀렸지만, 전체적으로는 포화지방과 비슷한 기다란 모양을 유지하는 트랜스 구조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트랜스지방과 포화지방 모양은 유사해 보입니다. 트랜스지방은 포화지방처럼 반듯한 모양이라 지방 분자들끼리 비교적 잘 겹쳐집니다. 시스지방은 꺾인 모양 때문에 잘 겹쳐지질 않지요. 그래서 트랜스지방은 따로 분리하기 위한 에너지가 더 필요해서 녹는 온도가 높습니다. 트랜스지방이 실온에서 고체인 이유입니다. 잘 뭉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체내에서 여러 가지 장애 요인을 유발할 수 있는 기능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불포화 지방산이 많은 시스 구조의 식물성 지방이 좋은 지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은 지방은 흡수도 어렵고 탄소의 이중결합 부분이 산소와 만나 산패하기 쉽습니다.


포화지방산의 분자구조(위)와 불포화지방산의 분자구조. 수소(H)가 꽉 채워진 포화지방산은 지네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수소가 덜 붙은 불포화지방산은 탄소(C)의 긴 사슬 사이 일부가 이중결합으로 연결돼 있다.

포화지방산의 분자구조(위)와 불포화지방산의 분자구조. 수소(H)가 꽉 채워진 포화지방산은 지네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수소가 덜 붙은 불포화지방산은 탄소(C)의 긴 사슬 사이 일부가 이중결합으로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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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마가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마가린이 오래도록 상하지 않는 이유는 불포화지방산의 비율을 줄여서 포화지방산의 비율을 높인 고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수소화(hydrogenation)라고 하는데 불포화지방산의 탄소 사슬을 이루는 이중결합을 끊고, 그 자리에다 수소 원자를 첨가해 넣은 것이지요. 이렇게 만든 마가린은 목적이 분명합니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있는 시절이 아니기에 지방을 오래 보관할 수가 없어서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방은 인류가 탄수화물 다음으로 쉽게 에너지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평민들이 지방을 장기간 보관해서 식량으로 쓸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공모했고, 화학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ege-Mouries)가 불포화지방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마가린은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물론 당시의 제품은 지금과 매우 다릅니다. 원료로 주로 동물 비계를 사용하다가 식물성 기름과 혼합한 것을 이용했고, 지금은 각종 식물성 기름을 주로 이용합니다. 트랜스지방산은 마가린의 수소화 과정 중에 생깁니다. 시스 구조가 트랜스 구조로 바뀌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어떤 화학반응에서든 원하는 생성물을 100% 만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말은 포화지방산이라고 해도 불포화 지방산이 전혀 없지 않아서 비빔밥처럼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단지 그 비율이 높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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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물성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방산의 길이와 포화도의 비율과 모양에 따라 성질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액체는 좋고 고체는 나쁘고, 포화의 여부에 따라 해가 된다는 주장도 근거가 약합니다. 포화지방은 흡수가 어렵고 혈관 벽에 쌓여 각종 심혈관 질환의 원인이라 하지만, 이런 일은 몸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지방은 쓸개즙의 유화작용으로 액화된 후에 소화되고, 혈관에도 리포단백질이라는 운반체가 지방이 혈관에 달라붙는 것을 방해합니다. 몸에 좋다는 식물성 지방은 인체에서 합성되지 않는 몇 가지 필수지방산 함량이 동물성 지방보다 다소 높다는 사실 이외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습니다.


이제 다시 트렌스지방과 포화지방이 정말 나쁜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최근 연구에서도 포화지방과 불포화지방이 심장 관련 질병을 유발하거나 억제한다는 근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연구 결과가 포화지방을 더 많이 섭취해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건강에 안 좋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직은 더 많은 연구가 되어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방을 먹는다고 몸에서 바로 지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은 에너지원일 뿐이고 대부분 음식물 분자가 해체되고 다시 조합되며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탄수화물이 지방을 만드는 재료를 충분히 공급합니다. 따라서 특정 지방을 제한 혹은 허용하느냐는 그다지 합리적 접근이 아닙니다.



풍요로움을 누리는 현대인들은 먹거리를 놓고도 선택에 고민합니다. 천연과 가공, 가염과 저염, 기능성 혹은 저지방 버터와 마가린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먹을 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걱정과 병이 생깁니다. 나폴레옹 3세가 보기에 현대인들의 음식사치가 이해되지 않겠죠. 우리나라는 식품 검사 기준이 높은 편이어서 마트에 진열된 제품이면 대부분 안심하고 먹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종류가 아니라 제품에 적혀 있는 용법과 그 양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방이 범인이라 의심되는 각종 성인병은 대부분 특정 종류를 많이 먹어서 생긴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는 과학을 모르셨지만 마가린 비빔밥은 맛뿐만 아니라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 그리고 핵산과 유산균과 같은 영양소가 균형 잡힌 건강식이었다는 건 알았을 것 같습니다.


김병민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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