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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의 중국여지승람]고결한 선비 도연명(陶淵明)

최종수정 2018.03.29 06:40 기사입력 2018.03.29 06:40

송재소
송재소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제각기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사업차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연 풍광을 감상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인문학적 유산을 답사하기 위해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중 인문기행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의 인물 탐방이다. 중국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했고 이들이 중국문명을 이끌고 형성했다. 또 이들은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해있는 우리나라의 정신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과 업적을 살펴보는 것이 중국문화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름길이 된다. 이들 인물 중에서 우리나라 선비들이 가장 존경했던 도연명(陶淵明)을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에 있는 도연명 기념관으로 찾아가 본다.

◆도연명은 누구인가?
도연명(365-472)은 지금의 강서성 구강시 시상현(柴桑縣) 율리(栗里)에서 몰락한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동진(東晉)의 개국공신인 도간(陶侃)이고 조부도 무창태수(武昌太守)를 지낸 명문이었으나 부친 대에 가세가 몰락하여 평생을 빈곤하게 지냈다. 29세에 청운의 뜻을 품고 첫 벼슬길에 나섰으나 곧 사직했고 36세에도 관직을 얻었지만 얼마 후 사직했다. 40세에는 당시 진군장군(鎭軍將軍) 유유(劉裕)의 참군(參軍)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가 또 사직했다. 그는 유유가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어긋나자 사직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출사와 사직을 반복한 것은 위진 남북조 시대의 혼탁한 정치현실이 그의 이상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재소의 중국여지승람]고결한 선비 도연명(陶淵明)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41세 때 주위의 추천으로 팽택현령(彭澤縣令)에 부임했는데 그 것은 순전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부임한지 80일 만에 벼슬을 박차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첫 벼슬길에 나선지 13년 만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때 젊은 감독관이 시찰을 나왔는데 예복을 갖추어 입고 공손하게 접대하라는 지시를 따를 수 없어서 "내가 어찌 다섯 말의 곡식 때문에 촌구석의 어린애를 향해 허리를 굽히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이번이 네 번 째 사직이고 이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마을에서 자연을 벗하고 살았다. 특히 420년(56세)에 유유가 동진의 황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후에는 책력(冊曆)도 보지 않고 칩거하며 세상과 등진 생활을 했다고 한다.

◆마음을 몸의 노예 되게 했으니
그가 팽택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떠나기 직전의 심경을 밝힌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된다.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이미 스스로 마음을 몸의 노예 되게 했으니 어찌 탄식하고 홀로 슬퍼하기만 하리오. 지나간 일은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고 앞으로 올 일은 따를 수 있음을 알았노라. 실로 길을 잃었으나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지난날은 잘못이었음을 깨닫노라.
그가 관직을 사퇴한 주된 이유는 윗글에서 밝혔듯이, 벼슬하는 동안 "스스로 마음을 몸의 노예가 되게 했기"(自以心爲形役) 때문이다. 이 말은 '먹고 살기 위해서 본성을 거슬렀다'는 뜻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쓴 '전원에 돌아와 살다'(歸田園居) 제1수에서 "티끌 그물 속에 잘못 떨어져 / 십삼년을 보냈네 …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다가 / 이제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도다"라 노래했다. 그는 관직생활 한 것을 "티끌 그물 속에 잘못 떨어진" 것이라 말했고 그런 자신을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에 비유했다. 그러므로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마음을 몸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의 몸이 되어 전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국화꽃 따다가 남산을 바라보다
이렇게 전원으로 돌아온 그는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후 여러 번의 출사(出仕) 권유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63세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20년 이상을 전원에 은거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문학사에서 전원시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어 후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음주'(飮酒) 20수 중 제 5수를 읽어본다.

사람 사는 세상에 띠 집을 지었어도 結廬在人境
말이나 수레가 시끄럽게 하지 않네 而無車馬喧
"묻노니 그대는 어찌 그럴 수 있는가?" 問君何能爾
"마음이 멀어지면 땅도 절로 외지다오" 心遠地自偏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采菊東籬下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悠然見南山
산 기운 밤낮으로 아름다워서 山氣日夕佳
나는 새들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네 飛鳥相與還
이 가운데 참된 뜻 들어 있는데 此中有眞意
말하고자 하여도 말을 잊어버렸네 欲辨已忘言

자연과 합일된 도연명의 심경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은거 생활 속에 인생의 '참된 뜻'(眞意)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것은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임을 나타낸다.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라는 구절은 이 높은 경지를 터득한 자의 자세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구절은 후대의 선비들이 본받아야 할 고결한 품성을 나타내는 자세로 받아들여졌다.

◆도연명 기념관
기념관에 들어가면 먼저 '채국도(采菊圖-국화를 따다)'라는 대형 그림이 눈에 띠는데 그림 오른쪽 상단에 앞서 소개한 '음주' 제5수가 쓰여 있다. 역시 이 시가 도연명을 대표하는 작품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도연명의 일생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그림과 사진과 도표로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옆에는 도연명의 사당인 도정절사(陶靖節祠)가 있다. '정절(靖節)'은 도연명 사후에 그의 친구인 안연지(顔延之)가 개인적으로 부여한 시호(諡號)인데 후대인들이 이 칭호를 즐겨 사용했다. 사당 안에는 2m가량의 도연명 소상(塑像)이 있고 여러 개의 편액과 주련(柱聯)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귀거래사'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석각되어 있다. 사당 앞에 있는 정자 귀래정(歸來亭)은 '귀거래사'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밖에도 그가 붓을 씻었다는 세묵지(洗墨池)가 있고 동리채국기지(東籬采菊基地-동쪽 울타리 국화를 따던 곳)까지 만들어 놓아서 도연명 생전의 풍모를 그려볼 수 있다.

사당에서 왼쪽으로 20여m를 가면 도연명 묘소가 있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참배를 하고 한국 소주를 한 잔 올렸다. 그가 평소에 술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마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도연명만큼 술을 좋아했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 망우물(忘憂物-근심을 잊게하는 물건), 배중물(杯中物-잔 속의 물건) 등 술의 별칭을 만든 사람도 그였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죽음을 가상한 일종의 조시(弔詩)라 할 수 있는 '의만가사'(擬挽歌辭)를 지었는데 그 속에서 "다만 한스러운 것은, 살아 있을 때 / 술 실컷 마시지 못한 것이네"라고 한 만큼 술을 좋아했다.

송재소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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