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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병인양요와 양헌수의 리더십

최종수정 2018.02.14 10:49 기사입력 2018.02.14 10:28

'척양척화' 칼 뽑아든 대장 양헌수
회군 명령 뿌리치고 그 바다를 건넜다

병인양요 기록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났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 아홉 명과 조선인 천주교도 8000명을 학살하는 등 천주교를 철저히 탄압했다. 이때 펠릭스 클레르 리델(Felix Clair Ridel) 신부는 조선을 탈출해 중국 천진(天津)으로 가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Pierre-Gustave Roze) 제독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했다.

로즈 제독은 9월 18일 프랑스 해군성의 명령을 받아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조선에 대한 군사행동을 단행했다. 프랑스 함대는 인천 앞바다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 인근 서강(西江)까지 진출했다. 지형 정찰과 항로 탐측을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하고 일단 중국으로 물러났다.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시작이었다.

로즈 제독은 10월 5일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 제2차 조선 원정을 위해 출항했다. 프랑스 함대는 함선 일곱 척과 해병대원 1000명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나타나 포격을 시작했다. 10월 16일에는 강화부(江華府)를 공격해 점령해 버렸다.

조선 정부는 강화도 탈환을 위해 금위영(禁衛營)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대장(大將)에 이경하, 순무중군(巡撫中軍)에 이용희, 순무천총(巡撫千總)에 양헌수를 임명했다. 조선군 주력은 김포의 통진부(通津府)에 주둔하며 강화도를 수복하고자 했다. 조선군은 10월 26일 문수산성(文殊山城)에서 프랑스군과 충돌하였으나 그들의 화력에 압도당했다.
양헌수는 화력이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병작전(奇兵作戰)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헌수는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덕포진(德浦鎭)에 주둔했다. 부하 세 명을 거느리고 정찰을 나섰다. 강화도쪽을 바라보니 작은 산성이 우뚝 솟아있었다. 부하에게 물어보자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 했다. 지세는 사면이 높고 험하며 동남쪽으로 두 길만 트여있어 공격하기 어려운 요새라고 했다. 양헌수는 소리쳤다.

"이야말로 조사(趙奢)의 북산(北山)이 될 만하도다. 만약 양도(糧道)가 끊어지지 않고, 포수(砲手) 500명이 바다를 몰래 건너가서 잠입하여 점거한다면 적은 우리 손바닥 안에 있을 것이다."

강화도 출신 부하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고기가 말라들어가는 물에서 입을 오물거리는 것 같으니 영감(令監)께서 뜻을 굳혀 들어가 점거한다면, 수만 명의 생령(生靈)이 이를 쫓아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강화도 주민 수만 명이 정족산성 남쪽에 모여있다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양헌수가 언급한 조사의 북산 얘기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나오는 일화다. 기원전 269년 진나라 대군이 한나라를 공격해 상당(上黨) 지역을 점령하고 알여(閼與) 지역을 포위했다. 다급해진 한나라는 조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은 조사(趙奢)를 장군으로 삼아 알여를 구원케 했다. 조사는 수도를 떠나 30리 정도 행군한 후 진영을 구축하고 한 달 가까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진나라 첩자가 조사의 군영에 도착하자 음식을 잘 대접해 돌려보냈다. 조사가 싸울 의사가 없다고 판단한 진나라는 기뻐했다.

하지만 조사는 진나라 첩자가 돌아가자마자 병사들의 갑옷을 벗게하고 빠르게 진군시켰다. 알여에서 50리 떨어진 곳까지 몰래 접근해 진영을 구축했다. 진나라 군대와 조나라 군대 사이에 위치한 북산(北山)이 관건이었다. 조사는 1만명을 동원해 급히 북산을 점령케 했다. 조나라의 움직임을 인지한 진나라 군대가 북산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조사가 병력을 이끌고 진나라 군대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진나라는 알여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양헌수는 출정 준비를 서둘렀다. 지방의 포수들을 주력군으로 편성했다. 향포수(鄕砲手) 367명, 경초군(京哨軍) 121명, 표하군(標下軍) 38명을 선발했다. 면포 꾸러미 250개를 만들어 2인 2일분의 식량을 담아 짊어지게 했고, 절편을 만들어 각자 두어개씩 휴대케 했다. 등짐은 일정 구간을 지나면 250명씩 교대로 지게 했다. 이로써 출정 준비가 완료되었다.

프랑스군의 눈에 띄지 않고 몰래 바다를 건너야 했다. 11월 6일은 음력 29일 즉 그믐날이었다. 이날 야간에 배를 타고 건너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 불가능했고, 그 사실을 본진(本陣)에 알렸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본진이 있는 후방으로 회군(回軍)하라는 답장이 왔다.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본진으로 회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0리도 못 간 상태에서 다시 덕포진에 주둔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군사들의 사기는 급속히 떨어졌다. 양헌수는 "몸을 되돌려 가면 더욱 추워서 입이 다물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신민(臣民)으로서 어찌 이 같은 수고로움을 사양하겠는가. 모름지기 걸음을 재촉하여 나를 따르라"며 부하들을 다독였다.

다시 말머리를 돌려 덕포진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자 저녁식사를 하고 강화수로(염하수로)를 건널 배와 군사들을 점검했다. 밀물과 썰물의 때를 감안해 도하 시기와 장소를 선정했다. 부대는 전군, 중군, 후군 3군으로 나누어 승선케 했다.

프리깃함 게리에르 함상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피에르 로즈 제독과 그의 병사들. 일본 나가사키의 항구에서 촬영됐다.

양헌수가 이끌고 있던 군사들은 대부분이 향포수(鄕砲手)들이었다. 강원도를 중심으로 경기도와 황해도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꿩 사냥을 하던 민간인이었다. 군대의 신호체계나 군율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적지로 들어가야만 했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이들을 이끌고 프랑스군의 감시를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부터 무모한 작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군사들은 배에 오르는 것을 주저했다. 양헌수는 칼을 빼어 들고 "너희들은 배타기가 겁나는가. 비겁한 병졸은 비록 10만이 된다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겁이 나면 모두 가거라. 내 장차 홀로 건너가겠다"라고 외쳤다. 그제서야 병사들이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본진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다시 본진으로 회군하라는 명령이었다. 양헌수는 "군대가 이미 배에 올랐으니 중지시킬 수 없습니다. 만약 다시 회군한다면 앞으로 다시 용병할 수 없습니다"고 답했다. 이 무렵 양헌수의 본가에서도 사람이 왔다. 본가에서 겨울옷과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양헌수는 "말에 오르니 집을 잊어 버리고, 성(城)을 나오니 내 몸을 잊어버렸다. 이제 장차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데, 맹세코 살아돌아오지 않겠다"고 답한 후 옷보따리를 던져버린 후 배에 올랐다.

강화도에 도착해 하선(下船)을 명령하자 군사들이 또 주저했다. 앞 언덕 수풀에 적병이 매복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양헌수가 나섰다. 먼저 하선해 지팡이로 언덕 수풀을 헤치면서 아무 것도 없다고 외치자, 그제서야 군사들이 모두 하선했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 500여 명은 무사히 정족산성으로 진입했다. 양헌수는 주 접근로인 남문에 포수 161명, 동문에 150명을 배치하고, 북문과 서문에 157명을 배치해 방어준비를 완료했다.

조선군이 정족산성을 점거했다는 소식이 로즈 제독 귀에 들어갔다. 로즈 제독은 마리우스 올리비에(Marius Olivier) 대령에게 150명을 거느리고 조선군을 공격케 했다. 11월 9일 정족산성의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들어오던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매복과 일제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결국 정족산성 전투 이후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부의 수많은 문화재와 재물을 약탈해 철수했고,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를 계기로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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