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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의 중국여지승람]남경의 젖줄 진회하(秦淮河)

최종수정 2017.11.29 14:28 기사입력 2017.11.29 14:28

송재소
 진회하는 총 길이 110㎞로 남경의 '어머니 강'으로 불린다. 이 강은 육조(六朝) 300여 년간의 문화를 꽃피운 남경의 젖줄이다. 남경성 동남쪽에서 외진회, 내진회로 나뉘고 내진회는 또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 중 남쪽으로 흐르는 갈래가 역대 문인들이 극찬해 마지않았던 이른바 '십리진회(十里秦淮)'이다. 이곳은 육조시대에 번성했다가 수당(隋唐) 시대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명청 시대에 이르러 극도의 화려함을 누렸던 지역이다. 지금도 여기는 남경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꼽힌다.

 따라서 이 지역엔 역사적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공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부자묘(夫子廟)가 있고 옆에는 중국 최대의 과거시험장이었던 공원(貢院)이 있다. 그리고 동진(東晉) 시기 고관대작들의 저택이 모여 있던 오의항(烏衣巷)도 여기에 있었다. 이곳은 옛날 오(吳)나라 때 금위군 중의 오의영(烏衣營)이 있던 곳인데 사병들이 모두 '오의(烏衣)' 즉 검은 제복을 입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오의항에 살았던 대표적인 귀족이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으로 '왕사(王謝)'는 후대에 고관대작의 대명사로 쓰였다. 현재 오의항에는 왕도사안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어서 그 옛날 영화로움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유우석(劉禹錫)의 시 '오의항(烏衣巷)'
 부자묘 앞의 문덕교(文德橋)를 건너면 '오의항' 세 글자가 쓰인 문루(門樓)가 보이고 문루 서쪽 담벼락에 당나라 시인 유우석(772-842)의 시 '오의항'이 모택동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왕도와 사안이 살던 때로부터 400여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 이곳을 찾은 시인의 감회를 읊은 걸작이다.

 주작교(朱雀橋) 가에는 들풀과 들꽃
 오의항 입구엔 석양이 비껴 있네
 그 옛날 왕사(王謝) 댁에 오던 제비가
 지금은 평범한 백성 집에 날아드네

 주작교는 옛날 오의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때는 사람과 수레로 붐볐을 터이지만 지금은 들풀과 들꽃만 피어 있고, 오의항 입구엔 석양이 비껴 있다고 묘사함으로써 쇠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4구가 압권이다. 해마다 제비는 왕도와 사안의 집에 날아오지만 지금 그들의 집은 평범한 백성들의 집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제비를 통하여 옛날과 지금을 연결하며 역사의 변천과 인생의 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가 너무나 유명하기에 모택동이 여기 들렸을 때 특유의 모택동체로 일필휘지 한 것이다.
 ■두목(杜牧)의 시 '박진회(泊秦淮)'
 유우석이 이곳에서 '오의항'을 쓴 몇 십 년 후에 역시 당나라 시인 두목(803-852)이 또 이곳 진회하를 방문하고 하룻밤을 묵으면서 인구에 회자되는 걸작을 남겼다.

 찬물에 안개 끼고 사장(沙場)엔 달빛 가득
 진회 술집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술집 아가씨 망국(亡國)의 한을 모르는지
 강 건너서 아직도 후정화(後庭花)를 부르네

 두목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육조의 옛 모습은 폐허가 되고 말았지만 진회 강변은 여전히 고관대작들이 환락을 즐기는 유흥지였던 모양이다. 강 건너 유흥지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가 '후정화'였다. '후정화'는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를 가리키는데 진(陳)나라 마지막 황제인 진숙보(陳叔寶)가 지었다는 노래이다. 그는 궁녀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하면서 환락을 일삼다가 수(隋)나라 의해서 멸망되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망국의 노래'라 일컫는다.

 그것도 모르고 술파는 아가씨들이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망국의 노래인 후정화를 부르는 철없는 술집 아가씨를 탓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국세가 기울어진 당나라 말기의 스산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진회 기생 이향군(李香君)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진회하 주변은 환락이 넘치는 유흥장이었다. 강변에는 무수한 술집, 찻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휘황찬란한 등불을 밝히고 노랫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흥지에 기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어서 아름다운 기녀들이 유객(遊客)의 발길을 붙들었는데 이 기녀들의 거처를 하방(河房)이라고 부른다. 특히 강 건너편 공원(貢院)의 젊은 과거 응시생들과 하방 기녀들과의 로맨스도 심심찮게 일어났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곳의 기녀들 중에는 상당한 식견을 갖춘 이들도 많았는데 그 가운데 유명한 기생 여덟 명을 '진회팔염(秦淮八艶)'이라 부른다. 마상란(馬湘蘭), 이향군(李香君), 유여시(柳如是), 진원원(陳圓圓)을 비롯한 여덟 명의 명기(名妓)들은 한 결 같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여 끝까지 정절을 지켰거나, 명말 청초의 급박한 상황에서 조국 명나라를 위하여 남자 못지않은 용기를 발휘한 여성들이다.

이향군
 이들은 당시 명망 있는 사대부의 첩이 되어 낭군으로 하여금 청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투쟁하도록 격려하기도 하고, 낭군이 청나라에 항복하여 벼슬을 하자 스스로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의기(義妓) 논개(論介)와 같은 여장부들이었다. 이 중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이향군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공자의 64대 손인 청나라 희곡 작가 공상임(孔尙任)이 쓴 '도화선(桃花扇)'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희곡 '도화선'의 내용은 이렇다. 명나라 말 조정에는 명나라를 지키려는 동림당파(東林黨派)와 부패한 환관들이 중심이 된 반동림당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을 엄당이라 부른다. 그즈음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세력이 커지자 엄당의 주요 인물인 완대성이 남경으로 피신했는데 그 때 남경에는 동림당의 후신을 자처하는 복사(復社)가 활동하고 있었다. 복사의 인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완대성은 복사의 후방역(侯方域)에게 이향군을 뇌물로 바치며 복사의 인물들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만난 후방역과 이향군은 깊은 애정을 나누었지만 정의감이 강한 이향군은 후방역으로 하여금 완대성의 요청을 거절하게 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완대성이 후방역을 살해하려 했고 이들은 피신한다.

 1644년 이자성이 북경에 진주하고 숭정황제가 자결하면서 명나라는 멸망을 맞는다. 그리고 왕실의 잔여 세력이 남경에 남명(南明) 정권을 세운다. 남명 정권 수립에 공을 세워 세력을 얻은 완대성은 후방역을 투옥시키고 이향군을 당시의 실력자인 전앙(田仰)의 첩으로 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향군은 땅에 머리를 찧으며 이를 거부했고, 흐르는 피가 사방에 낭자하게 뿌려졌다. 이때 후방역이 그녀에게 주었던 부채에 핏방울이 튀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후에 화가 양용우(楊龍友)가 이 핏방울을 꽃잎 삼아 부채에 도화(桃花)를 그렸다. 이것이 '도화선(桃花扇)'이다. 도화 즉 복숭아꽃을 그린 부채라는 뜻이다.

 그후 궁중에 감금되었던 이향군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서하산(棲霞山)에 피신했고, 후방역은 출옥하여 청나라에 항복하고 벼슬을 얻었다. 후에 서하산에서 두 사람이 만났으나 이향군은 명을 배반하고 청에 항복한 후방역과의 인연을 끊고는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의기(義妓)라 하겠다.

 공상임이 쓴 희곡 '도화선'은 비슷한 시기에 홍승(洪昇)이 쓴 '장생전(長生殿)'과 함께 청대 2대 희곡으로 손꼽히는 명작이다. 지금 진회 강변에는 이향군이 거처했던 집 미향루(媚香樓)가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녀가 쓰던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그녀의 거룩한 넋을 기리고 있다.

송재소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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