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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궁예를 칠 수 없다는 왕건의 마음을 흔든 것은?

최종수정 2017.11.15 14:05 기사입력 2017.11.15 14:05

거울에 비친 147자, "새로운 왕이 등장한다"

이상훈
660년 백제가 멸망했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전조(前兆)가 나타났다. 귀신 하나가 궁궐에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땅으로 들어가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땅을 파보게 했다. 깊이 3자 정도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거북이 등에는 '백제동월륜(百濟同月輪) 신라여월신(新羅如月新)'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백제는 달이 둥근 것과 같고 신라는 달이 새로운 것과 같다." 가득 찬 백제는 점점 기울고 차지 않은 신라는 점점 차오른다는 의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200여 년이 흘렀다.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건국되어 후삼국이 정립되었다. 후삼국 시기 왕건이 아직 궁예 밑에 있을 때의 일이다. 궁예의 난폭한 정치가 극에 달했을 무렵, 왕건 추대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 무렵 신라의 최치원이 왕건에게 문안을 드렸다. 최치원은 천명을 받은 비상한 인물이 개국(開國)할 것을 알고서 왕건에게 글을 보냈다고 한다. 그 글 가운데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라는 문구가 있다. "계림은 누런 잎이고 곡령은 푸른 소나무다." 계림은 신라를 의미하고 곡령은 개경에 위치한 고개 이름이다. 즉 신라는 이미 시들어버렸고 고려는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다.

 최치원은 신라의 충신으로서 난세가 되자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혔다. 이런 인물이 신라를 밀어내며 새로 등장한 왕건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아마 최치원의 영향을 받은 인물 중 하나가 왕건 세력에게 접근하면서 올린 글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을 왕건 입장에서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직접 올린 문안 글이라고 홍보했을 것이다.

 강원도 철원에는 왕창근이라는 자가 살고 있었다. 왕창근은 중국에서 건너와 후고구려의 수도 철원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백발(白髮)에 옛 옷과 모자를 착용한 괴상한 자가 나타났다. 왼손에는 자기(磁器) 사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낡은 거울을 들고 있었다. 괴상한 차림의 사내는 왕창근에게 낡은 거울을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왕창근은 쌀을 주고 거울을 사들였다. 그 자는 받은 쌀을 거리의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개성 만월대에 걸린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
왕창근은 사들인 낡은 거울을 벽에 걸어두었다. 거울에 햇빛이 비치자 작은 글자들이 나타났다. 모두 147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들은 암호처럼 되어 있었다. "사년(巳年) 중에 두 용(龍)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몸을 청목중(靑木中)에 감추고 하나는 형상을 흑금동(黑金東)에 나타낸다." 송함홍, 백탁, 허원 등이 글귀를 풀이했다. 청목은 소나무이므로 송악(松岳)을 나타내고, 흑금은 철이므로 도읍인 철원(鐵圓)을 나타낸다. 송악의 왕건이 철원의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는 내용을 비틀어 써놓은 것이다. 새로운 왕이 등장한다는 내용을 담은 참언(讖言)이다.

 역대 제왕들은 정권 탈취 목적으로 참언을 자주 활용했다. 참언을 이용해 정권을 탈취한 자는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스스로에게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참언의 위력을 아는 자들은 권력을 잡고나면 참언이나 참서(讖書)를 엄하게 금지했다. 하지만 나라가 혼란해지고 유력한 세력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참언이 나돌았다.

 참(讖)은 정치적으로 잘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늘에서 상서로운 조짐을 보여 칭찬하고, 잘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미리 재앙의 조짐을 보여 꾸짖는 것을 말한다. 중국 한나라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천명을 중시했다. 천명은 하늘의 뜻이며 새로운 제왕이 나타나기 전에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동중서는 '춘추번로(春秋繁露)'와 '한서(漢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일은 좋은 조짐을 보이고 나쁜 일은 나쁜 조짐을 보인다. 제왕이 장차 흥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상서로운 일이 먼저 나타나고, 제왕이 장차 망하게 되는 것은 요상하고 이상한 조짐이 먼저 나타난다."

 "하늘이 크게 쓰려고 하는 왕은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온다. 이것은 곧 하늘의 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천하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모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한다."

 앞서 왕창근이 사들인 낡은 거울에 새겨진 글귀가 바로 참언이다. 기괴한 옷을 입고 낡은 거울을 들고 나타난 자는 왕건 세력과 관련된 인물임에 틀림없다. 거울에 새겨진 참언은 궁예를 몰아낼 명분으로 사용하기 적합했다.

 왕창근의 거울 글귀 중에는 '선조계(先操鷄) 후박압(後搏鴨)'이라는 표현이 있다. "먼저 계림(鷄林)을 잡고 나중에 압록강(鴨綠江)을 취한다." 먼저 계림(신라) 지역을 잡고 나중에 압록강(북방) 일대를 취한다는 의미다. 당시 궁예가 수도로 삼고 있던 강원도 철원에서 볼 때, 계림은 남쪽에 있고 압록강은 북쪽에 있다. 왕건이 왕이 되어 남쪽과 북쪽을 모두 병합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북쪽 영역을 대체로 압록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압록강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옛 고구려의 수도(평양)가 있던 대동강이 아니라 보다 북쪽인 압록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 '고려사' 권14, 예종 12년(1117)의 기록을 보면, '압록구허(鴨綠舊墟) 계림고양(鷄林故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12세기 초 거란(요)은 여진(금)에게 타격을 입은 후 내원성(來遠城)과 포주성(抱州城)을 고려에 돌려주고 물러났다. 고려 조정에서는 압록강을 경계로 관방(關防)을 설치했다. 여러 신하들이 국왕에게 표문을 올려 축하했다. 이때 표문 속에 '압록의 옛 땅은 계림의 옛 땅'이라는 언급을 했다.

 이러한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바로 인정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12세기 고려인들은 압록강을 북방 경계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고자 했고, 이는 신라에서 계승되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현대인들이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선을 신라의 북방 '국경선'으로 인식하면서 고정관념이 굳어졌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국경선 개념보다는 '세력권' 개념이 더 강했다. 신라는 대동강 이북으로 북진하여 압록강 이남을 적극적으로 영역화하지는 않았지만, 완충지로서 압록강까지를 자기들의 세력권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918년 6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은 몰래 모의한 후 왕건의 저택을 찾아갔다. 궁예는 문제가 있으니 왕건이 대신 왕위에 오르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였다. 왕건은 거절했다.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두 번 오지 아니하므로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벌을 받습니다." 마지막에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귀가 저러한데, 어찌 가만히 있다가 궁예의 손에 죽을 것입니까?"라고 덧붙였다.

 왕건의 부인 유씨마저 여러 장수들의 얘기를 듣고 태조를 설득했다. 결국 왕건은 갑옷을 입고 칼을 빼들었다.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호위하며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금세 1만여 명이 모여들었고 궁성문으로 향했다. 궁예가 놀라 사복 차림으로 궁궐을 빠져나와 산 속으로 달아났다. 궁예는 오래지 않아 지역 주민에게 해를 입어 사망했다. 왕건의 고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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