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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의 중국여지승람]동정호(洞庭湖)와 악양루(岳陽樓)

최종수정 2017.11.01 08:32 기사입력 2017.11.01 08:32

先憂後樂 천하명문 범중엄의 岳陽樓記 그림만 보고 지었다

송재소
 호남성과 호북성의 경계에 바다처럼 큰 동정호가 있다. '해와 달이 그 속에서 뜨고 지는 것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넓은 중국 최대의 담수호이다. 지금은 퇴적물이 쌓여 크기가 줄어들었지만 풍광이 수려하고 인문학적 유적이 풍부해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들려 시문을 남겼다. 동정호 주변의 유적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악양루(岳陽樓)이다.

◆악양루와 '악양루기(岳陽樓記)'
악양루는 원래 3세기 초반 삼국시대 동오(東吳)의 장군 노숙(魯肅)이 수군(水軍)을 조련했던 열군루(閱軍樓) 즉 지휘소였다. 이 후로도 주로 군사적 용도로 이용되다가 당나라 때부터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목조 건물이었던 이 누각은 화재와 전란으로 파괴되고 중건되기를 수십 차례나 거쳤는데 최종적으로 1984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양루는 동정호를 조망할 수 있는 경치 좋은 누각이어서 유명하지만 악양루를 더 유명하게 한 것은 '악양루기'이다. 1044년 북송(北宋)의 혁신파 인물 등자경이 이곳으로 좌천되었을 때 당시 퇴락한 악양루를 크게 중수하고 1046년에 역시 좌천되어 등주(鄧州)에 있던 친구 범중엄(范仲淹)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이 기문을 부탁할 때 등자경은 악양루의 연혁과 환경, 기후, 건축의 특징과 함께 '악양루만추도(岳陽樓晩秋圖)'라는 그림을 함께 보냈다. 그러므로 범중엄은 악양루에 직접 가보지 않고 관련 자료만을 바탕으로 '악양루기'를 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양루기'가 천하의 명문으로 애송된 것은, 이 글이 악양루와 동정호의 풍경 묘사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글 속에 담긴 범중엄의 사상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악양루의 큰 경치를 간략하게 기술한 다음에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는 "천객 소인(遷客騷人-좌천된 사람과 시인)"이 느끼는 두 종류의 감회를 묘사하고 있다. 비오고 파도치는 음산한 저녁 무렵에 이 누각에 오르는 천객 소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슬퍼할 것이고, 물결이 잔잔한 따뜻한 봄날, 달 밝은 밤에 이 누각에 오르는 천객 소인은 술잔을 기울이며 모든 것을 잊고 기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단락으로 끝난다.

아! 내가 일찍이 옛 어진 자들의 마음을 살펴보니 이 두 부류의 사람들과 달랐느니 이는 어째서인가? (옛 어진 자들은) 외물(外物)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자기 일신상의 일 때문에 슬퍼하지도 않는다. 조정의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백성들을 근심하고 먼 강호에 처할 때는 임금을 근심하였으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한 것이다. 그러니 어느 때에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말하기를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하겠다"라 하리라. 아! 이러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 누구와 더불어 함께할 수 있으리오.
범중엄(989-1052)은 자(字)가 희문(希文)으로 북송의 걸출한 사상가이며 청렴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문학가였다. 그는 부패한 조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안을 제안하여 혁신정치에 앞장섰지만 이로 인하여 등주로 좌천되었다. 이 마지막 단락은 정치가로서의 범중엄 자신의 인생관이다. 특히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이른바 '선우후락(先憂後樂)'은 후대 수많은 정치가들의 좌우명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 구절을 특히 좋아해서 자주 인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악양루기' 고사(故事)
범중엄의 '악양루기'는 소자미(蘇子美)가 쓰고 소송이 각(刻)을 해서 누각에 걸어놓았는데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 1740년에 악주(岳州-지금의 악양) 현령 황응도(黃凝道)가 당대의 명필 장조(張照)를 충동질하여 글씨를 받고 교지(交趾-지금의 월남)의 자단목(紫檀木)에 새겨서 12폭을 다시 완성하여 누각에 비치했다. 후에 신임 현령 오씨(吳氏)가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시켜 그대로 임모(臨摹)한 뒤에 현령직을 사임하면서 원래의 12폭을 배에 싣고 귀향하며 누각에는 모조품을 남겨 놓았다. 그런데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해버렸다. 얼마 후에 한 어부가 물에 빠진 원본을 발견하여 보관해 오다가 대학자 오민수(吳敏樹)가 은 120냥을 주고 매입했다. 후에 정부에서 오민수의 자손으로부터 은 120냥으로 매입하여 악양루 2층에 걸었다. 현재 악양루에는 1층과 2층에 두 개의 '악양루기'가 걸려 있는데 1층에 있는 것이 모조품이고 2층에 있는 것이 장조가 쓴 진품이라고 한다.

◆두보(杜甫)의 '등악양루(登岳陽樓)'
악양루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작품이 두보의 시 '등악양루'이다. 두보(712-770)는 안록산의 난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49세 되던 760년 봄 사천성의 성도(成都)에 정착했다. 그러나 53세 때 그를 후원해주던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 엄무(嚴武)가 별세한 후 두보는 성도를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57세 되던 해 1월에 가족을 이끌고 기주(夔州-지금의 남경)를 떠나 장강을 따라 내려가며 선상생활을 했다. 그해 연말에 악양루 아래 정박하고 이후 악양과 장사를 왕래하다가 59세 가을에 배 안에서 객사했다. '등악양루'는 처음 동정호의 악양루에 올라 감회를 읊은 시이다.

 동정호 있단 말 옛날에 들었건만 昔聞洞庭水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게 붻네 今上岳陽樓
 오(吳)나라 초(楚)나라는 동남으로 갈라졌고 吳楚東南坼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떠있네 乾坤日夜浮
 친한 벗에겐 소식 한 자 없고 親朋無一字
 늙고 병든 이 몸엔 외로운 배 한 척 老病有孤舟
 관산(關山) 북쪽엔 아직도 오랑캐 말 戎馬關山北
 난간에 기대니 눈물 콧물 흐르네 憑軒涕泗流

성당(盛唐)의 오언율시 중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되는 작품이다. 특히 제3구와 제4구에서 광활한 동정호의 경관을 10개의 글자로 표현한 솜씨가 놀랍고, 또한 늙고 병든 고단한 신세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그의 애국충정이 잘 들어난 시라 하겠다.

악양루 3층에 모택동(마오쩌둥)이 쓴 이 시가 걸려있는데 글자 하나가 틀렸다. 제6구의 '老病有孤舟'에서 '病'이 '去'로 되어있다. 이것은 모택동이 1964년 악양루를 둘러보고 북경으로 가기위한 기차역에서 쓴 것이라 하는데 급히 쓰다가 아마 착각한 것이라 생각된다. 모택동 특유의 활달한 필치에서 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글씨이다.

◆소교묘(小喬墓)
악양루 주변에는 매선정(梅仙亭), 삼취정(三醉亭), 회보정(懷甫亭), 소교묘 등의 유적이 있는데 이 중 소교묘가 눈길을 끈다. 오(吳)나라의 손책(孫策)이 안휘성을 공격하고 그곳에서 교공(喬公)의 두 딸을 얻어 큰딸 대교(大喬)는 자기가 차지하고 작은딸 소교를 주유(周瑜)에게 주었다. 두 자매를 '이교(二喬)'라 부른다. 이 일대가 주유의 군사령부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소교의 묘가 여기 있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묘 입구에 소동파(蘇東坡)의 글씨로 "멀리 당년의 공근(公瑾-주유의 자)을 생각해보니 소교가 처음 시집갔을 때 영웅의 자태가 빼어났을 터"라는 글귀가 돌에 새겨져 있다.

이교와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제갈량이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주유와 담판하던 중에 말하기를 "조조의 제일 소원은 천하를 평정하여 황제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 소원은 이교를 얻는 것이라 하니 장군께서 이교를 조조에게 바치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오"라 했다는 것이다.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이교는 그토록 빼어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송재소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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