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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의 중국여지승람]세계문화유산 명 효릉

최종수정 2017.09.27 12:39 기사입력 2017.09.27 12:39

육조고도(六朝古都) 남경

송재소
강소성의 성도인 남경(南京)은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여섯 왕조가 도읍한 곳이라 하여 '육조고도(六朝古都)'라 불린다. 이 후에도 1368년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이곳을 도읍지로 정했고, 1853년에는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군이 남경을 점령한 후 도읍지로 정하고 천경(天京)으로 개칭했다.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청조(淸朝)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된 곳도 남경이며, 1927년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도읍을 정한 곳도 남경이다. 이렇게 보면 남경은 '육조고도'가 아니라 '십조고도(十朝古都)'가 되는 셈이다.
남경이 역대 왕조의 도읍지가 된 것은 여러 가지 지정학적 여건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곳은 자고로 왕기(王氣)가 서린 곳이라 하여 예부터 중시되어 일찍이 제갈량(諸葛亮)도 남경을 '제왕의 집'이라 말한 바 있다. 손문(孫文)도 남경을 두고 "이곳은 높은 산이 있고 깊은 강이 있으며 넓은 들이 있다. 이 세 가지 자연 조건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세계의 대도시 중에서 진실로 이렇게 좋은 곳은 찾기 어렵다"라 평가했다.

명나라 개국 황제 주원장(朱元璋)
육조고도 남경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명태조 주원장의 묘 효릉이다. 주원장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한때는 호구지책으로 황각사(皇覺寺)에서 중노릇까지 하다가 반원(反元) 지도자 곽자흥(郭子興)이 이끄는 홍건군(紅巾軍)에 들어가서 탁월한 군사 전략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곽자흥이 죽은 후에는 실질적인 영도자가 되었다.
당시는 원나라 말기여서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군의 우두머리 중에서 주원장, 진우량(陳友諒), 장사성(張士誠)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주위에 우수한 보좌진을 규합하고 강력한 라이벌인 진우량, 장사성을 차례로 격파하고 1368년 1월 4일에 명나라 황제에 등극했다.
그는 1381년부터 남경의 자금산(紫金山) 남쪽에 자신의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듬해에 마황후(馬皇后)가 죽자 먼저 이곳에 매장하고 마황후에게 '효자(孝慈)'라는 시호를 내리는 한편 능을 효릉(孝陵)이라 명명했다. 1383년에 능의 중심 건물이 완성되었는데 그가 직접 지휘한 이 공사에 1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원장은 1398년 자신이 조성한 무덤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그때 비빈과 궁녀 40여 명이 함께 순장되었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넓은 묘역에는 당시에 소나무 10만 그루를 심고 사슴 1000마리를 방사했으며 5000여 군사가 밤낮으로 순찰하며 호위했다고 한다. 주원장이 죽은 후에도 부속건물 등이 계속 조성되어 1413년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가 성덕비(聖德碑)를 세움으로써 공사가 끝났으니 착공한 지 32년 만에 완공된 것이다. 효릉은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도(神道)의 석상(石像)들
입구의 하마방(下馬坊)으로부터 대금문(大金門), 비루(碑樓), 신도(神道), 문무방문(文武方門)을 지나 대석교(大石橋)를 건너면 효릉의 마지막 건물 방성(方城)이 나온다. 방성은 두께가 31m나 되는 견고한 성인데 이 성에 나있는 터널 같은 통로를 뚫고 올라가면 주원장과 마황후의 무덤이 나온다. 무덤은 직경 400m, 둘레 1000m, 높이 7m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를 보성(寶城)이라 한다. 옛날엔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성역이었으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후에는 유람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무덤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보성 정면에 '이 산은 명태조의 묘이다(此山明祖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일곱 글자가 새겨진 연유는 이렇다. '주원장이 정말 이곳에 묻혔을까?'라는 의문이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민간 전설에 의하면 주원장의 장례식 날 남경성의 13개 성문에서 동시에 관이 운구되었다고 한다. 백성들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의 시신은 남경의 조천궁(朝天宮)에 안장되었다는 설도 있고, 명나라가 북경에 천도한 후 북경 근교의 만세산(萬歲山)에 이장했다는 설도 있고, 평소 의심이 많았던 주원장이 도굴을 염려하여 효릉에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거국적으로 조성한 묘역이 가짜일 수 없다고 생각한 후대의 어떤 사람이 이곳이 진짜 주원장의 묘임을 알리기 위하여 이 일곱 글자를 새겼다는 것이다.
효릉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 600여m에 걸친 신도 양쪽에 설치해 놓은 동물 석상이다. 여기에는 사자, 해태, 낙타, 코끼리, 기린, 말의 석상이 각각 4개씩 놓여 있는데 두 마리씩 마주보고 있다. 특이한 것은 4마리의 석상 중 두 마리는 서있고 두 마리는 앉아있다. 이들 동물 석상의 크기는 각기 다른데 제일 큰 코끼리 석상은 높이 3.47m, 길이 4.21m, 무게가 80t에 달한다고 한다. 명나라를 건국한 제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건조물이다. 동물 석상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인 신도에는 문신과 무장의 석상이 이어진다. 이 문무석상의 특이한 점은 문신과 무장 모두 반은 수염이 있고 반은 수염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 수염의 유무로 늙은이와 젊은이를 구분한 듯 보였다.
또 하나 볼만한 것은 '치륭당송비(治隆唐宋碑)'이다. 이것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1699년 이곳을 참배하고 세운 비석으로 '치륭당송'은 '(명나라의) 치적이 당나라 송나라 보다 더 융성했다'는 뜻이다. 강희제, 건륭제는 여러 차례 효릉을 참배했는데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을 무마하려는 통치술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강희제가 '치륭당송' 4글자를 쓰면서 명나라를 높이 평가했을 때 수만 명의 주민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를 보면 강희제는 실로 노련한 통치자임에 틀림없다.

비운의 황태자 주표가 묻힌 동릉(東陵)
효릉 동쪽에 동릉이 있는데 여기에는 주원장 일가의 기구한 사연이 얽혀 있다. 주원장은 일찍이 맏아들 주표(朱標)를 황태자로 봉하고 황제 수업을 시켰다. 주표는 어머니 마황후를 닮아 성품이 인자해서, 주원장이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를 때에도 어머니와 함께 이를 극력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병약하여 황제에 즉위하지 못한 채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원장은 그를 동릉에 장사지내고 의문태자(懿文太子)의 시호를 내렸다. 이어 주원장은 주표의 아들 주윤문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으니 이가 제2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이다. 건문제는 즉위 후 부친 주표를 효강황제(孝康皇帝)로 추존하고 흥종(興宗)의 시호를 내렸다.
황제의 아들은 '왕(王)'이란 칭호를 받는다. 주원장은 생전에 여러 아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권력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건문제가 일부 신하들의 말을 듣고 이 삼촌들의 왕위를 삭탈해 버렸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 주체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반란을 일으켜 건문제를 축출하고 황위에 오르니 이가 곧 영락제(永樂帝)이다. 영락제는 효강제로 추존되었던 주표를 다시 의문태자로 강등시키고 주표의 자손들을 모두 살육했다. 숙부가 조카를 축출한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세조가 단종을 몰아낸 형국과 비슷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세계는 무자비한 것이다. 세조가 반인륜적인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업적을 남겼듯이 영락제도 여러 가지 치적을 통하여 명나라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다.
주표가 묻힌 동릉은 돌보는 이 없이 600년 이상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방치되다가 1999년 대대적인 발굴 조사를 통하여 지금과 같이 복원되어 효릉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송재소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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