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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의 중국여지승람]중국 서법(書法)의 성지, 난정(蘭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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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성의 소흥(紹興)은 크고 화려한 도시는 아니지만 중국의 인문 정신을 살피는 데에는 보석 같은 도시이다. 수 천 년의 역사가 축적된 이 도시에는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 이 난을 통하여 두어 번 소개했지만 미진한 점이 있어 다시 이 일대를 둘러보기로 한다.

소흥 근교의 난정은 왕희지의 「난정집서」로 유명한 중국 서법의 성지이다. 왕희지(303-361)는 소년 시절에 남경에 살다가 13,4세경에 가족을 따라 이곳으로 이거해서 48세경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소흥을 맡아 다스리게 되었다. 회계는 소흥의 옛 이름이다. 그는 회계로 부임한 이듬해(353년)에 '난정계회'를 개최하여 저 유명한 「난정집서」를 썼다.
◆아지비정, 난정비정 그리고 곡수유상
난정 대문을 들어서면 '아지 비정'이 보인다. '아'자는 왕희지의 글씨이고 '지'자는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글씨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희지가 '아'자를 써놓았는데 조정의 칙사가 왔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떠난 후 아들이 '지'자를 이어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석을 부자비(父子碑)라 부른다.

좀 더 들어가면 蘭亭 두 글자를 새긴 '난정비정(蘭亭碑亭)'이 나타난다. 이 비석은 강희 황제의 친필인데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네 토막으로 깨어진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손상이 심해서 '蘭'자의 아랫부분과 '亭'자의 윗부분이 결손되어 어색해 보인다.

왕희지(王羲之)

왕희지(王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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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비정 오른 쪽에 '곡수유상처(曲水流觴處)'가 있다. 곡수유상이란 '꼬불꼬불한 물길에 술잔을 띄운다'는 뜻인데, 여기가 왕희지를 비롯한 42명의 인사들이 함께 계회를 열었던 곳이다. 우리나라 경주의 포석정과 비슷한 구조물이다. 이 모임은 옛날부터 내려온 풍속으로 매년 3월 3일 물가에 모여 몸의 때를 씻고 액운을 물리쳐 달라는 소원을 비는 행사이다. '之'자 모양의 물길 양쪽에 사람들이 앉아 있고 위에서 술을 채운 술잔을 띄우는데 이 술잔이 자기 앞에 이르면 술잔의 술을 마시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야 한다. 만일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시게 되어 있다.
이날 모인 42명 중에서 왕희지, 사안(謝安), 손작(孫綽)을 비롯한 11인이 시 2수씩 지었고 15인이 1수씩 지었으며 나머지 16인은 시를 짓지 못해 큰 사발로 벌주 3잔씩 마셨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인 37수의 시를 묶어 책으로 만들고 왕희지가 즉석에서 서문을 썼는데 이것이 '천하 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 불리는 28행 324자의 「난정집서」이다. 지금도 음력 3월 3일을 '중국 난정 서법절'로 정해서 매년 국내외의 인사들이 모여 당시 왕희지가 주관했던 곡수유상을 재현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다고 한다.

◆강희와 건륭의 친필이 새겨진 어비정
곡수유상처 바로 앞에 '유상정(流觴亭)'이 있고 그 뒤에 '어비정(御碑亭)'이 있다. 높이 6.86m, 넓이 2.64m의 대형 비석의 앞면에는 강희 황제의 친필 「난정집서」 전문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강희의 손자 건륭황제의 자작시 '난정즉사(蘭亭卽事)'가 역시 건륭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제왕의 기상이 서려있다는 평을 받는 이 비석을 후인들은 '조손비(祖孫碑)'라 부른다.

어비정은 1693년에 건립되었는데 1956년 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1983년에 다시 중건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석 자체는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에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지 않은 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문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난정은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 임시 방역소(防疫所)로 지정되어 의료진들이 진주해 있었다. 틀림없이 홍위병들이 비석을 파괴하러 올 것이라 예상한 의료진들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가지 꾀를 고안해내었다. 비석 전체에 석회를 칠하고 앞면에는 붉은 색으로 모택동의 시「송온신(送瘟神)」을 쓰고 뒷면에는 모택동 어록에 있는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千萬不要忘記階級鬪爭)'는 구절을 써놓았다. 이를 본 홍위병들이 감히 비석에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열여덟 개의 항아리와 태자비
어비정 옆에 '태(太)' 자가 쓰인 비석이 서 있고 그 주위에 낮선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돌로 만든 18개의 항아리와 각각의 항아리 앞에 대리석 판이 하나씩 놓여 있는데 이것은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를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왕헌지가 어렸을 때 글씨를 연습한 고사가 많은데 그 중 이런 얘기가 전한다. 어느 날 왕헌지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글씨를 잘 쓰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왕희지는 마당에 있는 18개의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항아리 속의 물을 다 써서 연습하고 나면 그 비결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十七帖-王羲之

十七帖-王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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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왕헌지는 항아리의 물로 먹을 갈아 연습을 했는데 3개 항아리의 물을 소비한 후 '이쯤 하면 되었겠지'라는 교만한 마음이 생겨 몇 글자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다. 이를 본 왕희지는 글자 중에서 '大' 자를 골라 점 하나를 찍어 '太' 자로 만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어머니에게 보여드려라." 이를 본 어머니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리 아들이 3개 항아리의 물을 써서 연습을 하더니 오직 점 하나만 아버지를 닮았구나." 이 말을 들은 왕헌지는 크게 뉘우치고 18개 항아리의 물이 다하도록 연습하여 후일 대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희지를 '서성(書聖, 글씨의 성인)'이라 부르고 왕헌지를 '소서성(小書聖)'이라 부른다.

◆「난정집서」의 기구한 유랑
「난정집서」는 왕희지 자신도 가장 아끼던 작품으로 그의 사후에는 왕씨 집안의 보물로 전해지다가 7대손 지영(智永) 스님에 이르렀다. 지영 스님은 작고하기 전 이 보물을 제자인 변재(辨才) 스님에게 전했다. 당시 80여 세가 된 변재 스님도 글씨를 좋아해서 「난정집서」를 밤에만 몰래 꺼내어 임모하고는 대들보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다.

한편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왕희지의 글씨를 무척 좋아해서 널리 그의 작품을 수집했는데 「난정서」를 입수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었다. 진본을 변재가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여러 번 그를 불러 「난정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전란 통에 없어졌다고 둘러대었다.

그 후 당태종의 마음을 읽은 신하 소익(蕭翼)이 교묘한 방법으로 변재 스님에게 접근하여 몰래 훔쳐내는 데에 성공했다. 「난정집서」를 도둑맞은 사실을 안 변재는 혼절했다가 가까스로 깨어났는데 몇 개월 후 당태종은 변재에게 곡식 3000석과 비단 3000필을 내렸으나 그는 이것으로 3층탑을 건조하고 일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태종이 죽은 후 그 아들 고종은 부친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난정집서」를 함께 순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때 「난정집서」뿐만 아니라 태종이 가지고 있던 왕희지의 글을 모두 순장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현전하는 왕희지의 글씨는 진품이 하나도 없다는 설이 생겼다. 또 어떤 설에는 저명한 서법가 저수량의 건의에 의해 순장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난정서」를 둘러싼 괴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나라 말 오대(五代) 때 소릉이 후량(後梁)의 절도사 온도(溫韜)에 의해서 도굴당하여 다시 세상에 나왔다고도 하고, 고종이 자신의 무덤인 건릉에 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래의 곽말약(郭沫若)은 색다른 주장을 했다. 여러 정황으로 봐서 진대(晉代)에는 모든 글을 예서체로 썼는데 유독 「난정집서」만 해행(楷行)체로 썼을 리 없다고 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글씨뿐만 아니라 서문의 문장도 왕희지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이것이 왕희지의 후손 지영(智永)의 소행이라고 추측했다.

이 밖에도 난정에는 왕희지의 사당인 '왕우군사(王右軍祠)'가 있고 '난정서법박물관' 등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송재소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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