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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칼럼]살진 사형수의 뽀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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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용진 기자] 몇 년 전 어떤 사형수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적이 있다. 엉터리 기사로 허위사실을 유포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으니 그 손해를 돈으로 배상하라는 요구였다.

그가 ‘허위사실’이라고 지목한 것은 “초등학생을 납치·성폭행 하려다 살해한 혐의로”라고 쓴 부분이었다. 자신은 ‘강간살인’이 아니라 ‘강제추행·살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내가 쓴 기사 가운데 ‘성폭행’이라는 표현은 강간을 의미하는 것이니 틀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2명의 여자 초등학생을 납치해 살해하고, 1명의 성인 여성을 폭행해 숨지게 한 사실이 인정돼 사형이 확정됐다. 초등학생을 납치한 것은 ‘성적 가해행위’가 목적이었고 실제로 피해 어린이의 몸안 깊은 곳에서 상처가 발견됐다.
판결문에서는 ‘손가락 등 이물질을 몸 안에 삽입시켜 생긴 상처’라고 밝히고 있다. 검찰은 그를 강간살인으로 기소했고, 1심에서는 강간살인으로 사형이 선고됐다. 2·3심은 강간의 증거가 없다며 강제추행 살인을 인정하긴 했지만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니까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혐의로”라는 표현은 절대 틀린 표현이 아닌 셈이다. 설령 틀렸다고 해도 ‘강제추행·살인’이나 ‘강간살인’, 혹은 ‘성폭행하려다 살해’라는 표현 사이의 미세한 차이로 인해 사형수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기자생활을 하다보면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는 것은 부지기수고 가끔은 정말 말도 안되는 소송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처럼 어처구니 없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사건을 맡아준 변호사는 “죄수들이 외출을 하고 싶어서 별 희한한 소송을 건다고는 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봤다”고 기가 막혀 했다.
하지만 정말 기가 막히는 순간은 바로 그 다음, 법정에서 그 사형수의 얼굴을 직접 대면했을 때였다. 푸른 수의에 사형수를 의미하는 붉은색 수인번호를 달고 있었지만, 그는 너무도 뽀얗게 부티가 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이 오른 포동포동안 몸집에는 기름기가 흘렀다.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라도 법정에 서면 왠지 위축되기 마련이지만 그는 법정이 오히려 익숙하고 여유로운 듯 긴장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무렵 그에게 살해 당해 숨진 초등학생의 부친은 홧병과 심장병으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막상 가해자인 그는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미결수 신분인 사형수는 작업을 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저 먹고 자는 게 일이라는 전언도 있었다. 그러니까 변호사의 말처럼 먹고 자다가 심심하니 억지소송을 낸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어금니 아빠’ 이영학에 대해 법원이 사형을 선고하면서 조만간 사형수 숫자가 다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집행은 안하는데 선고만 하다보니 사형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제 우리나라도 사형집행을 재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는 모양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사형에 반대한다. 소송을 걸어왔던 그 사형수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사형을 집행하라고 하고 싶지만, 문명국가라면 마지막까지 교화의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사형수들을 방치하고 있는 듯한 현 교정행정은 분명 잘못됐다. 내일 모레 죽을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살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면 교화와 교정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당국의 의무다. 적어도 ‘강간’과 ‘성폭행’의 차이를 꼬투리 삼아 소송을 내는 고장 난 양심을 방치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장용진 기자 ohngbear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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