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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고통에 대하여, 희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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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재 논설위원

이명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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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시 ‘귀향’에서 '오너라, 오랜 고통이여‘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타향에서 나그네 노릇을 하고는 훨씬 평온해졌지만, 고통을 다시 원한다’고, ‘우리는 다시 싸우려고 한다’고 ‘가슴을 부딪치고 다투련다’고 말한다. 그에게 돌아가야 할 고향은 고통이다. 고통과 싸우는 것이 귀향인 것이다(조동일 교수).
고통이라는 고향. 고통과 고난은 인간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참인간에게 하는 것이다. ‘잘 성장했다는 것은 큰 결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을 너무 많은 것으로부터 차단시켰다는 뜻이 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많은 걸 가졌다는 것, 부족할 게 없고 고통 없이 살았다는 건 살아가는 데 거쳐야 할 것들의 결핍이기도 하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문학의 폭과 넓이가 깊어지고 넓어졌던 것도 뇌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로 인한 고통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성찰, 시대의식으로 확장된 데 있었으니 겐자부로에게 아들 히카리는 그 이름의 뜻처럼 그야말로 ‘빛’이었던 것이다.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현자 크리슈나가 “군주는 지옥을 경험해야 한다”고 했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유협이 “마음 속에 맺힌 것이 못 견디고 밖으로 뛰쳐 나올 때 그 사무치고 절절한 것이 가슴을 울리는 글이 된다”고 했지만 그 지옥과 고통이 군주와 작가에게만 필요한 것이겠는가.
우리의 삶에 희망이란 게 있다면, 우리가 어떤 희망을 찾으려 한다면 그건 고통과의 대면에 있을 것이다. 고통이 없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내며 고통을 견뎌내며 고통을 이겨내려는 것, 그것이 곧 희망이 아니겠는가.

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고통과 눈물과 한숨으로 이뤄져 있는가. 아침 6시를 갓 넘긴 시각, 충무로 지하철 역을 나오면 만나는 작은 천막. 겨울 새벽의 오싹한 한기를 막기에는 너무도 힘에 부치는 듯한 비닐 가리개 안에 앉아 쭈글쭈글한 손으로, 그러나 웃는 얼굴로 천원에 세 개인 붕어빵을 건네주는 50대 여인. 대체 몇 시에 집을 나서야 할까. 그곳을 지나면 이미 불을 밝히고 문을 연 커피 가게 젊은 아가씨의 가여운 어깨. 간밤부터 내내 불을 끄지 않았을 편의점 카운터를 지키고 서 있는 중년의 사내. 5시도 안 된 시각에 회사로 나갈 때, 아직 여명도 비치지 않는 새벽에 이미 절반가량의 좌석을 채우고 있는 이들의 허름한 옷차림, 그 삶의 주름살들.

새벽을 여는 사람들, 하루의 시작을 마련해주는 이들이다. 나의 일터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니 내가 아무리 이른 시각에 나오더라도 이미 사무실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을 비우며 화장실을 닦는 아주머니들. 어머니의 마음으로 수십 명의 아들과 딸들을 챙겨주는 그 정성.
그것을 나는 ‘빛’이라고 해야겠다. 가족을 먹이고 키워주는 빛, 대한민국을 비추는 빛이라고 해야겠다. 궤변을 늘어놓는 이가 가진 권력이니 금력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빛이라고 해야겠다. 광화문(光化門) 광장이 그 이름처럼 촛불의 빛(光)으로 광명을 펼쳐주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아침마다, 또 어디에서든 만나는 빛들이라고 해야겠다.

내일부터 설 연휴다. 그러나 빛을 뿜어내는 많은 이들에게 우울한 명절이다. 바닥의 불경기에 취업난, 불안한 미래, 거기에 권력의 무능과 타락이 현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불혼(不婚)·불임(不姙)’의 젊은이들은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다.

그러나 설은 대지에 새 기운이 오르는 것을 자축하는 새 생명의 시간. 그 생명의 명절에 우리는 애써 우리의 희망을 찾는다. 새벽이면 충무로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 커피집과 편의점과 거리에서, 새벽과 밤과 한낮에 우리 옆에서, 우리 자신에게서 만나는 빛. 그래서 우리는 고통이여 오라, 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희망이여 오라, 라고 말한다.





이명재 편집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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