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촛불시위가 열린 지난 7일, 참사 1000일을 맞은 세월호 아이들을 위한 진혼제였던 이날 우리가 광화문의 세월호 부모들에게서 본 것도 그런 슬픔, 지상의 말을 무력하게 하는 슬픔이었다. 그 자리에는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친구들이 연단에 올라 살아남은 미안함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날 광화문에는 세월호 아이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유난히 많이 나왔던 듯하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 자기 자신일 수도 있었을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이들의 눈물. 그 눈물은 왜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혹한의 추위에도 기어코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지를 보여줬다. 왜 사람들이 경건한 예배처럼 촛불을 켜는 마음인지를 보여줬다.
돌이켜 보면 지난 두달여 동안의 촛불 드라마가 기적인 것은 철벽정권에 대한 승리 그 자체보다 그 승리가 지극히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에 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승리는 촛불시위를 누구보다 먼저 시작하고, 누구보다 많이 참여한 것이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광장의 아이들’은 폭력을 막아주는 가드레일이었다. 폭력을 덮는 꽃이었다. 폭력의 자제로써 폭력 이상의 힘을 내는 온유한 힘, 절제된 힘의 큰 원천이었다. 현실에 아직 마비되지 않은 아이들의 맑은 마음과 의식이 뿜어내는 분노, 그 정결한 분노의 힘이었다.
되돌아보면 지금의 기적은 무언가 신비로운 섭리가, 역사의 간지와도 같은 신비가 작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것이 누구의 보살핌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광화문 광장 위에는 세월호 아이들이 있었다. 배 안에 물이 차오를 때 친구를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준 그 고결한 아이들이 있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들의 어머니인 그 아이들이 있었다. 선배를 보호하려다 숨져 간 ‘소년 종철이’의 순결한 혼이 광장의 하늘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의 선취(先取)된 미래다. 그들로 인해 죽음은 삶을 가르쳤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스승이 됐다.
지금 우리가 광장에 나서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우리는 가족들의 비탄을 결코 진정으로 위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최선을 다하려 할 뿐이다.
대선의 어지러운 정치공학이 펼쳐지려는 염려가 짙어지는 지금, 정치인들의 출발점은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이명재 편집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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