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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 어느 84학번의 광화문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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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명이 모인 지난 12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 무대에 가수 정태춘이 올랐다. 10여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 ‘저항하는 음유시인’이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부를 때 군중 속에서 촛불을 들고 앉아 있던 50대의 남성 C씨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20여년 전 즐겨 듣고 불렀던 노래, 그때마다 눈물을 쏟아내던 노래였다. 몇 소절을 따라 읊조렸다.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는 대목에서 울컥하는 그에게 옆에 있던 20대 젊은이가 "저 가수가 누구냐?"고 물어 왔다. 저 흘러간 가수, 흘러간 노래가 바로 옛날의 나였다,고 그는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랬다. 노래와 함께 저 푸르렀던 20대의 그날이 떠올랐다. 푸르르기도 했고, 고단하고 암울하기도 했던 그 시절의 나날들이 떠올라 눈가가 축축해졌다.

‘나는 무엇이 되어,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가.’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이들처럼 그를 불러냈던 것은 분노였다. 열망이었다. 그리고, 회한이었다. 92년 장맛비가 내리는 서울 거리’의 노래 가사가 그를 먹먹하게 했던 것은 분노와 열망에 앞서는 회한과 자책이었다. 지금의 이 참담한 현실 앞에 얼굴을 들기 어려운 부끄러움, 자신을 향한 질타였다. 그의 대학 동문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한다며 이름을 올려달라고 해 왔을 때 그의 마음 한 자락이 불편했던 것도 그 자책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차라리, 동기 한 명이 작성해 ‘작은 선언문’이라고 이름 붙여 내놓은, 그러나 선언문이라기보다는 ‘반성문’이라고 해야 할 글이 그의 심경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 중년의 우리는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을 만큼 당당한 자리에 있지 않다.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적법한 절차와 원칙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일해 왔는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관행화된 부조리를 보고 겪으며 우리 각 개인은 때로 무력했고 때로 비겁했다.”

C씨가 촛불을 들고 소리를 높일 때 그건 자신을 향한 규탄과 질타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젊은이들의 선배로서, 아이들의 어른으로서 면목이 없는 자신에 대한 질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만한 청와대 수석, 그리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장관이 자신의 84학번 대학 동기라는데, 그와 같은 ‘친구’들이 괴물이 돼 가는 동안 나나 우리는 대체 무얼 했던가, 하는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집회가 끝난 뒤 C씨는 광화문 광장을 나오는 길에 ‘박근혜 퇴진 이후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이라는 제목의 벽면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시민들이 쓴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었다. “공정하고 공평한 대한민국” “우리 아이들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 사회” “열심히만 한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자신이 지나왔던 92년, 아니 80년대의 기원과 열망들이 거기에 고스란히, ‘여전히’ 담겨 있었다. 그것은 광장에서 직업과 계층을 넘어서 만나고, 나이를 넘어 노인과 어린이가 만나듯 92년과 2016년, 아니 미완의 80년대와 2016년이 만나고 있는 장면이었다.

C씨는 자신의 안에서 뭔가 잊고 있었던 게 조금 되살아 오르는 걸 느낀다. 나이를 먹는 것은 곧 무력해지고 비겁해지는 것이지, 라는 마음이 퇴적층처럼 쌓여 있는 내면의 밑바닥으로부터 뭔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그것을 이를 테면 ‘소년’이라고, ‘청년’이라고 해 두자. 그리고 '어제의 청년’이 ‘오늘의 청년’과 만나는 걸 그려보자. 그럴 때 정태춘 시인의 노래처럼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은 ‘다시 일어서지’ 않을까. 또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지' 않을까.

이명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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