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5일 여성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며 파리 시청에 몰려갔다. 그들은 내친김에 파리 남서쪽 17km 떨어진 베르사유 궁까지 행진하기로 한다. 왕을 만나 빵을 요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무려 5000명이 무리지어 걸어갔다.
파리 여성들은 왕과 왕비, 왕세자를 “빵집 주인과 그 마누라”라고 놀리면서 파리로 데려갔다. 그 후 왕과 그 가족은 베르사유 궁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 이제 파리가 프랑스 정치와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매우 컸다. 소외되었던 민중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루이 16세는 10월6일부터 파리 튀일르리 궁에 갇혀 지낸다. 숲에서 사냥도 못하고 가까운 곳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시대 변화에 둔감한 왕은 어리석게도 파리에서 도망칠 궁리를 한다. 1791년 6월20일 자정 조금 넘은 시간, 왕과 그 가족은 튀일르리 궁을 빠져나가 마차를 타고 룩셈부르크 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도망친 지 23시간 만에 국경 근처 작은 마을 바렌에서 잡히고 만다.
낮이 가장 긴 하짓날, 시골길에서 왕의 마차를 끄는 마부의 화려한 복장을 시골사람들이 못 봤을 리 없다. 게다가 왕은 영리하지 못하게 사람들 앞에 얼굴을 보였다. 사진이 없던 시절이지만 동전에 찍힌 왕의 옆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았다. 바렌에서 붙잡힌 왕은 국민방위군의 감시를 받으며 파리로 되돌아갔다.
왕의 도주 사실을 안 파리 시민들은 튀일르리 궁, 시청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성난 그들은 루이 16세의 조각상을 부쉈다. 언론은 루이 16세를 더 이상 왕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제2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혁명을 마무리할 단계라고 생각한 의원들은 어떻게든 이 사건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왕은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1792년 12월26일 왕이 의회에 출두했다. 왕의 변호사 드 세즈가 일어나, “왕은 헌법 정신을 결코 범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승인한 권한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변론을 펼쳤다. 이어 발언권을 얻은 루이는 “나는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으며 나의 변호인은 진실만을 말했다”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지난 9일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촛불혁명’의 1단계 성공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 가결 후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며 억울함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직무정지 직전에 조대환 변호사를 신임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임명한 데 이어 탄핵심판에서 자신을 대리할 변호인단 선임도 서두를 전망이다.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국외로 도주한 망명 귀족들을 두고 생겨난 말이 있다. “그들은 배운 것도 없고 잊은 것도 없다.” 루이 16세와 박 대통령의 경우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21일 단두대에 올랐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