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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와 史] “배운 것도 없고 잊은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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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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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7월14일 파리 시민들은 전제와 압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요새를 함락했다. 잇단 흉작으로 빵 값이 폭등해 1789년 프랑스 서민 가정은 수입의 80% 이상을 빵 구입에 지출해야 했다. 살인적인 물가였다. 10월 초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왕과 왕비가 머물고 있는 베르사유 궁에서 군인들이 “왕과 왕비 만세!”를 부르며 흥청망청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파리 시민들은 분노했다. 특히 빵 값, 반찬 값에 민감한 주부들의 분노가 컸다.

10월5일 여성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며 파리 시청에 몰려갔다. 그들은 내친김에 파리 남서쪽 17km 떨어진 베르사유 궁까지 행진하기로 한다. 왕을 만나 빵을 요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무려 5000명이 무리지어 걸어갔다.
루이 16세는 숲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소 즐겨 찾던 프티 트리아농 궁에 있었다. 왕과 왕비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궁으로 돌아갔다. 10월5일 밤은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새벽이 되자 파리 여성들이 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왕비의 침실까지 마구 들어갔다. 왕과 왕비는 2층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올라가 마당에 모인 군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 군중이 외쳤다. “파리로 갑시다!”

파리 여성들은 왕과 왕비, 왕세자를 “빵집 주인과 그 마누라”라고 놀리면서 파리로 데려갔다. 그 후 왕과 그 가족은 베르사유 궁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 이제 파리가 프랑스 정치와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매우 컸다. 소외되었던 민중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루이 16세는 10월6일부터 파리 튀일르리 궁에 갇혀 지낸다. 숲에서 사냥도 못하고 가까운 곳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시대 변화에 둔감한 왕은 어리석게도 파리에서 도망칠 궁리를 한다. 1791년 6월20일 자정 조금 넘은 시간, 왕과 그 가족은 튀일르리 궁을 빠져나가 마차를 타고 룩셈부르크 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도망친 지 23시간 만에 국경 근처 작은 마을 바렌에서 잡히고 만다.

낮이 가장 긴 하짓날, 시골길에서 왕의 마차를 끄는 마부의 화려한 복장을 시골사람들이 못 봤을 리 없다. 게다가 왕은 영리하지 못하게 사람들 앞에 얼굴을 보였다. 사진이 없던 시절이지만 동전에 찍힌 왕의 옆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았다. 바렌에서 붙잡힌 왕은 국민방위군의 감시를 받으며 파리로 되돌아갔다.
왕의 도주 사실을 안 파리 시민들은 튀일르리 궁, 시청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성난 그들은 루이 16세의 조각상을 부쉈다. 언론은 루이 16세를 더 이상 왕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제2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혁명을 마무리할 단계라고 생각한 의원들은 어떻게든 이 사건을 덮으려 했다.
그들은 왕이 스스로 도망친 게 아니라 납치되었다는 등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왕을 감쌌다. 파리 시민들은 실망했다. “국회는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왕의 편이구나.” 한동안 왕과 의원들의 희망대로 정국이 고착되는 듯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1792년 8월10일 분노한 파리 시민군은 튀일르리 궁을 공격하고 루이 16세를 탕플 감옥에 가뒀다. 마침내 1792년 9월21일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공화국 원년’의 시작이었다. 바스티유 함락에 이어 ‘제2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왕은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1792년 12월26일 왕이 의회에 출두했다. 왕의 변호사 드 세즈가 일어나, “왕은 헌법 정신을 결코 범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승인한 권한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변론을 펼쳤다. 이어 발언권을 얻은 루이는 “나는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으며 나의 변호인은 진실만을 말했다”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지난 9일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촛불혁명’의 1단계 성공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 가결 후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며 억울함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직무정지 직전에 조대환 변호사를 신임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임명한 데 이어 탄핵심판에서 자신을 대리할 변호인단 선임도 서두를 전망이다.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국외로 도주한 망명 귀족들을 두고 생겨난 말이 있다. “그들은 배운 것도 없고 잊은 것도 없다.” 루이 16세와 박 대통령의 경우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21일 단두대에 올랐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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