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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 칼럼]단식과 정치인, '딱한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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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정세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19일부터 신경을 쓰는 눈치. 민한당의 유치송 총재 등 당 간부들은 이 흐름을 관심있게 관망하고 있다는 전언이나, 이에 대한 당 차원의 논의까지는 생각 못하고 있으며 유 총재는 19일에는 당사에 나오지 않았고 20일에는 지역구에 귀향." (1983년 5월20일자 동아일보 2면)

'정세흐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을 가리킨다. 그는 5월18일부터 '광주사태' 3주년을 맞아 민주인사 석방, 언론자유 보장, 헌법 개정 등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외신과 달리 국내 언론은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통제로 며칠간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못했다. 동아일보 보도 이후 '정세 흐름' '정치 현안' '어느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 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단식이 1주일을 넘어서자 전 정권은 그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단식은 계속돼 6월9일까지 23일간 이어졌다. 그의 단식은 '정국의 물줄기를 바꾼 기폭제'가 된다. 민주화 투쟁에 불을 붙여 1984년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 출범과 12월 신한민주당 창당의 동력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단식도 정치사의 한 페이지에 남는다. 그는 평민당 총재이던 1990년 10월, 64세의 나이로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및 내각제 포기를 요구하며 13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지방자치 부활은 그의 단식 투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군부 독재정권 시절, 정치 지도자의 단식 투쟁은 이렇듯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독재정권에 대항해 중요한 고비 때마다 '극단적인 자해의 방법'을 강력한 투쟁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달리 보면 굴곡 많은 우리 현대 정치사의 부정적 산물이기도 하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투쟁 수단으로서의 단식은 계속되고 있다. 개별 사안에 대한 반대나 항의가 대부분인 점이 과거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이라크 파병 반대'(2003년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거부 항의'(2003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하 쌀 협상 반대'(2005년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 등이 그런 경우다. 2007년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반대해 열린우리당 김근태, 천정배 의원 등이 단식한 것도 그렇다.
정치인의 단식이 잦아지면서 국민의 관심이나 호응은 예전 같지 않다. 이른바 대의(大義)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요구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로 비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민주화 후에도 정치인들이 원내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장외로 나가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주의, 주장을 펼치는 데 대한 거부감이 커진 탓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의 단식을 두고 말들이 많다. 세월호 특별법으로 사회 전체가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대통령 후보였으며 현재 제1야당 내 최대 계파인 친노 진영의 수장인 그의 단식이 과연 적절하느냐는 문제 제기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무력화하고 가뜩이나 위기에 놓인 당을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비판이 주류다. '김영오 씨 단식 중단 및 유족이 동의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내세우지만 속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여야 협상을 무산시켜 갈등을 키우고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강경 투쟁을 부추긴다는 비난도 나온다.

돌봐야 할 민생현안은 쌓여있는데 세월호 특별법에 막혀 국회는 공전 중이다. 새정치연합은 지리멸렬 상태다. 유력 대선후보로 꼽히는 문 의원이 과연 '단식'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지, 참 딱하다.





어경선 논설위원 euhk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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