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년 유비는 백제성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유비는 후사를 제갈량에게 맡기고 태자 유선을 도와 한나라의 부흥을 당부한다. "당신의 재주는 위의 황제 조비의 열 배나 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켜 대사를 이룰 것이다." 그는 유비의 유명을 받들어 234년 산시성 우장위안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진다.
제갈량이 떠맡은 촉한의 국운은 풍전등화 상태였다. 오나라와 싸운 이릉 전투는 국가재정을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유능한 장수와 관료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촉한 건국의 주역 방충, 법정도 사라졌고 조자룡과 황충은 늙고 병들었다. 더구나 황제 유선은 어리고 유약했다. 위나라는 천하의 삼분지 이를 차지하고 풍부한 인재와 물자를 자랑하였고, 오나라도 양자강의 이점과 강남의 경제력에 힘입어 번창하였다. 제갈량은 '모든 힘을 다하며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는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 死而後已)의 비장한 각오로 국정쇄신에 전념했다.
다음으로 제갈량은 안으로 내치(內治)를 든든히 하는 데 진력하였다. 농업에 힘써 생산량을 늘리고 백성들의 민생을 해결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토록 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촉나라의 안위와 중원 도모의 전초기지가 되는 한중(漢中) 지방에 사람을 이주시켜 경작을 장려하여 한중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였다. 한중 경제가 소생하지 못했다면 북벌 사업도 무망했고 촉나라의 명운도 수십 년 앞당겨졌을 것이다.
남쪽 지방을 친정하여 남만(南蠻) 세력을 진압함으로써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고 남쪽의 풍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화해'와 '회유'를 기본원칙으로 하여 맹획왕을 7번 잡았다가 7번 풀어주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전략으로 그들을 진심으로 복속시켰다.
제갈량이 후세의 모범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공직자로서의 청렴결백과 깨끗한 처신 때문이다. 그가 남긴 글에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다"는 표현이 있다. 황제 유선에게 올린 상소에서 "신은 뽕나무 800그루와 밭 15경을 갖고 있어 자손들의 살림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외에 재산을 불려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평생 지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늘리지 않았고 질박한 삶을 영위하였다.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은 찾아서 반드시 상을 내렸고 민생에 깊은 애정을 기울였다.
제갈량의 인품과 업적은 시공을 초월하여 후세 사람의 마음을 깊이 흔들어 놓았다. 당의 시성 두보(杜甫)는 시 촉상(蜀相)에서 "군사를 내어 뜻 이루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죽으니 천하 영웅들의 옷깃을 눈물로 적시네"라는 구절을 남겼다. 가히 만고의 성신 아니겠는가.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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