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오늘 새벽 5시. 이육사는 북경의 감옥에서 그렇게 죽었습니다. 반년 전 어머니 소상(小祥)에 고향엘 갔다가 일경에 붙잡혀 이곳 북경으로 왔습니다. 1년만 더 견뎠으면 꿈에 그리던 해방을 보았을 텐데. 몇 달만 더 견뎠으면 나이 40이라도 채웠을 텐데.
이 때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의 주요기관을 파괴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윤세주의 의열 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이육사는 형 원기와 동생 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합니다.
그러던 중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무차별 검거에 나섭니다. 이육사는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습니다. 이때 수감번호가 '264' 번이었습니다. 진범을 잡지 못해 초조해진 일경은 육사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육사를 폭탄 운반자로,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가했습니다.
1932년 10월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 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에 입교해 6개월간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습니다. 수료 후 비밀 임무를 띠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34년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가 없어 풀려납니다.
이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육사는 문학으로 항일을 하기로 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합니다. '절정', '광야', '청포도' 등과 같은 30 여 편의 시와 정치 사회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씁니다.
그는 몸으로, 입으로 함께 항일 투쟁을 벌인 진정한 독립투사였습니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itbri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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