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중국 흑룡강성 연안현 명천촌 출신 리영준(58). 그는 지난 2003년 한국에 돈 벌러왔다. 그러나 그는 무려 8년동안 시골식당에서 폭력에 시달리며 현대판 노예로 살다가 얼마전 KBS 인권수사대 제작진에 의해 구출됐다.그는 지금껏 월급 한푼 못 받았다.
'리 타다나리(한국명 이충성)' ! 그는 일본의 영웅이다. 올초 극적인 결승골로 아시안컵을 일본에 안겼다. 그는 제일교포 4세, 우리는 축구선수인 그를 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이래 그의 꿈은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었다. 2004년 각고의 노력끝에 한국 18세 이하 대표로 선발됐다. 그는 희망에 부풀어 현해탄을 건넜다. 차별없이 오직 축구에 전념하고, 조국에 헌신할 수 있다는 꿈이 마침내 이뤄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반쪽발이'라며 일본인들도 아닌 동포들에게서 차별을 받았다. 냉대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조국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차없이 짓밟았다. 그가 친일한 것도 아니고, 조국에 반역한 것도 아녔는데도.
끝내 그는 꿈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인보다 더 차별하는 동포들에 대한 기억과 설움, 상처만 안은 채. 그는 곧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6년 귀화 신청해 2007년 2월 일본인이 됐다. 그러자 이번엔 조국에 등을 돌렸다며 배신자라고 그를 비난했다.
왕조시대 반란과 대역죄, 왕족ㆍ귀족에 대한 도전행위가 이에 해당된다. 연좌제에 걸리면 근친은 물론 본인의 친가, 외가, 배우자의 가계, 본인의 외가, 부친의 외가, 배우자의 집안 등 물론 삼족이 멸했다. 연좌제는 1894년 갑오경장때 폐지됐다. 그러나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지난 80년이다.
하지만 단지 기록일 뿐이다. 식민ㆍ분단시대의 연좌제는 펄펄 살아 있다. 이충성은 일본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리영준도 마찬가지다. 그는 중국을 선택하거나 그의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것이 그들의 죄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들에게 죄값을 받으려고 혈안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여기 또다른 이가 있다.
2010년 6월 16일 새벽 3시 30분.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축구장에서 브라질과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 북한의 국가가 울려퍼지자 팀의 주전인 정대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경기후 "'드디어 이 자리에 왔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내가 축구를 시작한 이후 이런 날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다.세계 최고의 강팀인 브라질과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고 술회했다.
그의 국적은 한국이다. 월드컵에는 북한선수로 출전했다. 그는 늘상 일본에게 지는 북한팀이 서러워 인공기를 달았다. 그는 분단조국의 아픔을 느끼며 살아온 한국인이다. 정대세는 자신의 꿈이 박지성과 한팀에 돼서 경기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남북단일팀 ! 그의 꿈은 가히 형벌이다. 꿈을 꾸면 꿀수록 형벌의 무게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그 또한 식민ㆍ분단의 연좌로부터 허덕거리는 인생을 지녔다.
그들은 불행한 역사의 희생양이다. 성김은 미국인이다. 귀화이전의 이충성은 한국인이다. 하지만 미국인은 환영받고, 한국인은 박해받는다. 그들이 식민ㆍ분단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리영준, 이충성, 정대세에게 가해진 식민ㆍ분단의 연좌제는 피해자인 그들에게 식민ㆍ분단의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식민지 경험과 분단 현실이 없었다면 지금같은 리영준, 이충성, 정대세가 존재할까 ?
영어를 아예 모국어로 삼자는 이들이 있고, 미국을 잘 따르는 것이 살길이라고 민족을 끝없이 인도하는 이들이 있고, 미국적인 사고ㆍ행동이야말로 지성이라고 일컫는 이들이 수두룩한 현실의 다른 이면이 이충성이다 .
사랑받는 미국인 성김을 바라보는 그들은 지금 또 상처를 받고 있다.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조국 때문에 그들의 상처는 결코 아물 수 없다.
친일파의 후손은 여전히 떵떵거리는 역사가 청산되지 않는 한 그들이 돌아올 조국은 없다.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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