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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장 바뀐 날 그 지점에 갔다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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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 하는 충무로 산책

대한민국 은행이 인정하는 신분증은 생각보다 꽤 다양하다.

‘신분증’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은 기본이고 여권, 공무원증, 장애인복지카드, 노인복지카드, 국가유공자증, 학생증 등을 제시해도 본인확인이 가능하다.
위에 열거한 ‘쯩’은 얼굴사진이 붙어있고 주민등록번호가 적시돼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내 지갑에는 이런 ‘쯩’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뒤져도 돈 몇 푼과 신용카드가 고작이다.

이런 경우 신용카드는 단지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할 뿐 도무지 주종 관계를 입증하지 못한다.
주인의 신분과는 전혀 무관하게 단지 ‘먹고, 마시고, 뭘 사는 데’ 쓰이는 한낱 소비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문득 신용카드에 사진을 붙이고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넣어 신분증으로 갈음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남의 카드 들고 다니며 신용사회를 어지럽히는 부작용도 예방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현재의 관행대로 서명만으로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건 도무지 무책임한 상거래 아닐까? 주인이 쓰는 것인지, 아니면 남이 가짜 서명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안다고 해도 물건 파는 사람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서명과 영수증 사인을 꼼꼼히 대조할까? 그냥 팔아치우는 게 시간도 절약되고, 매출도 늘리고, 인간관계도 훼손되지 않고 일석삼조 아닌가 말이다. 혹시, 신용카드에 사진 붙이고 주민등록번호 적어 넣으면 카드매출이 줄어들까 두려워하는 배후세력이 있는 거 아닐까?)

눈앞의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는데 전혀 도움이 못되는 이런 쓸데없는 잡념에 빠져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영리한 그녀’가 금세 눈치 챈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신분증 없으면, 갖고 다시 오세요.”

그 여직원 입장에선 당연한 주문이었으나, 나에겐 ‘뒤에 손님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통첩으로 들렸다.
자기비하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쌀쌀맞은 은행원을 볼 때 마다 생각나는 풍경이 하나 있다.

*****

13년 전, 그러니까 한국경제의 주도권이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으로 넘어갔던 1998년 초.
당시 나는 경기도 과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를 출입하고 있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추웠다.

바쁜 일정에 밀려 미루고 미뤘던 은행 볼일을 보러 과천 시내의 한 은행 지점에 갔다.
정기예금을 깨기 위해서였다.
IMF 한파로 신문사 사정이 안 좋아져 월급이 몇 달째 나오는 둥 마는 둥 하던 시절.
집사람이 결혼예물과 애들 돌 반지 등 장롱 속 금붙이를 긁어모아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해서 마련한 몇 십만 원마저 다 쓰고 난 직후였다.

그 때 찾아간 그 은행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있었다.(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 ‘넘버원(number one)'으로 불리며 잘나갔던 이 은행은 부실대출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 외국계 은행에 합병됐다. 이 과정에서 은행장이 구속되기도 했고, 대출담당 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내가 그 은행 과천지점에 갈 당시 이 은행은 한국정부와 IMF간의 협상 과정에서 정리대상 목록에 올라 있었다. 한국정부는 살리고 싶어 했고, IMF는 시장논리를 내세워 정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 한국정부가 부실화된 민간은행을 지원하여 목숨을 연장한다면 IMF는 구제금융에서 손을 빼겠다고 한국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IMF가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분류한 이유는 BIS비율이 너무 낮기 때문이었다.
즉, 국제결제은행((BIS,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이 정한 위험자산(부실채권) 대비 자기자본비율이 기준 이하로 낮아졌다는 것이었다. BIS비율은 ‘자기자본/위험자산×100’의 공식으로 산출된다. 은행이 BIS비율을 높이는 가장 간명한 방법은 분모인 자기자본을 늘리거나, 분자인 위험자산을 낮추는 것이다.

어쨌든 IMF가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소식이 시중에 알려지면서 고객들은 이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은행이 가장 겁내는 이른바 뱅크 런(bank run) 사태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행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은행원들은 자칫 직장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어서 오세요. 뭘 도와 드릴까요”

과천지점의 그 여행원도 이런 말로 나를 맞이했다.

“적금을 깨러 왔는데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낭패와 불안의 표정이 어른거렸다.

“만기까지 그냥 두시면 안 될까요. 저희 은행이 위험하다는 말이 돌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설마 고객예금을 못주는 사태까지야 가겠어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정부가 예금자보호제도를 강화한 것 혹시 알고 계시나요?”

물론 알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인 1997년 12월말 내가 그 기사를 썼던 것이다.

“잘 알고 있는데요. 돈이 급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몇 분간의 팽팽한 정적이 흘렀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자기 자리를 벗어나 창구 이쪽으로 건너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울듯이 말했다.

“꼭 지금 필요한 돈이 아니라면 그냥 맡겨두시지요. 만약 계속 적금 붓기가 불안하시면 적금을 깨서 정기예금으로 옮겨 놓는 건 어떨까요? 지금 금리가 높으니까 고객님에게는 큰 이익입니다.”

신용공황이 이어지면서 정기예금 금리가 연 10% 후반까지 올라가 있었기에 금리가 연 7~8%로 확정된 적금을 깨고 정기예금으로 갈아타는 게 낫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출퇴근용 자동차가 먹어대는 기름도 사야했고, 무엇보다 만 한 살이 채 안된 둘째의 분유 값이 절박했다.(맞다, 이 칼럼의 캐리캐처를 그려준 바로 그 놈인데 그 당시 엄청 먹어대고 있었다.)

*****

1929년 ‘조선저축은행’으로 출발하여 한 때 ‘넘버원’, ‘퍼스트 뱅크’로 불렸으나 방만한 경영으로 지금은 외국자본으로 넘어간 그 은행.

아들 셋에 5개 언어를 구사하며 테니스와 스키, 다이빙을 즐기고 아스날(Arsenal) 팀의 열렬한 팬이자 회원이라는 푸른 눈의 1965년생 영국인 은행장을 모시고 6천명의 한국직원이 전국 414개 영업점에서 일하고 있는 그 은행.

그 은행의 간판을 볼 때마다 13년 전 몇 백만 원의 현금을 건네면서 가볍게 떨리던 그 여행원의 하얀 손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 은행은 한때 ‘First is the Best'란 슬로건과 함께 엄지를 곧추세운 손을 형상화한 로고를 사용했다. 지금은 볼 수 없게 됐지만....)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신분증과 연금신탁 문제’는 어렵사리 해결됐다.

신분증을 갖고 다시 오라고 압박하는 (현재의) 그녀에게 이렇게 들이댄 게 먹힌 것 같다.

“돈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이 통장에 있는 거 다른 통장으로 옮기는 건데, 꼭 본인확인이 필요한가요?”

그녀는 연금신탁 입금증에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전화번호 등을 자필로 적어 넣도록 한 뒤 그 입금증을 근거로 ‘대체거래’를 처리해줬다.

10분 남짓 걸어서 다시 편집국으로 돌아와 보니 그 은행에 새 은행장이 취임했다는 기사가 아시아경제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었다.

그 전날 사의를 표명했던 전임 은행장도 그날 비공개 이임식을 갖고 은행을 떠났다고 한다.

전임 은행장은 1971년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32년간 ‘은행밥’을 먹은 셈이다.
기사를 보니 공교롭게도 내가 13년 전 과천에서 찾아갔던 바로 그 은행에 입행해서 11년간 일한 뒤 지금의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만약 그가 이직하지 않았다면 그 은행이 외국계 은행으로 넘어갈 때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취임식 사진을 보니 새 은행장은 활짝 웃고 있었다. 무척 기뿐 듯 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중심은 바로 고객입니다.”
“고객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자 가치를 창출하는 근원입니다.”
“고객을 위한 최선의 선택만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 영업, 조직, 제도 시스템 등 모든 면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객중심’ ‘현장지향’ 원칙을 철저하게 실천해 나갑시다.”
“우리 안의 벽을 먼저 허물고 서로 공감할 수 있어야만 고객과 은행 사이에 놓은 마음의 벽 역시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취임사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연말까지는 하루 더 남았는데, 은행장이 바뀐 뒤에 찾아갈 걸. 너무 일찍 간 거 아닐까?’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 싶다.

최고 경영진들 사이에 불분명한 명목으로 15억 원에 달하는 불투명한 자금거래가 있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고, 수사 과정에서 전 은행장이 비서실장을 시켜 현금 3억 원을 자동차 트렁크에 싣도록 한 정황도 나타났고, 경영진이 외국에 있는 대주주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혐의도 있고,(물론 정확한 건 수사가 다 끝나봐야 알겠지만) 또 그 은행이 스스로 자랑하는 강한 조직문화를 ‘끼리끼리’ 또는 ‘우리끼리’ 문화라고 깎아내려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걸로 봐서 ‘그 은행이 영업력은 뛰어나지만 신뢰와 투명성은 취약해 보이는데, 은행장이 언제 어떤 사람으로 바뀔지 누가 미리 알 수 있었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취임사를 통해 ‘고객’과 ‘현장’을 강조한 새 은행장은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은행장 후보로 전혀 거론되지 않던 의외의 인물이었다는 게 언론의 지적이다.

그래서 은행 안팎에서는 ‘깜짝 은행장’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도대체 취임사는 언제 준비한 걸까?)

아무튼 ‘깜짝 은행장’이든 준비된 은행장이든 새 사람이 은행장으로 왔으니 그 은행 그 지점을 다시 한 번 찾아가 볼 작정이다.
이번에는 꼭 신분증 챙겨서.

☞ 박종인의 당신과 함께 하는 충무로산책 보기



박종인 본부장 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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