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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곤혹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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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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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말이다. 가르치는 사람에겐 늘 곤혹스런 시간. 쌓아둔 과제를 읽고 냉정한 평가를 해야 한다. 잠시 글을 쓴 학생의 얼굴을 떠올린다. 한 명, 한 명 나와 함께 긴 여정을 걸어온 동지요 도반이다. 모두들 나를 보고 생글생글 웃고 있다. 눈망울엔 간절함이 한가득. 좀 더 좋은 점수를! 마이너스 보다 제로, 제로보다 플러스를! 취업을 앞둔 복학생일 경우 그 간절함은 배가된다. 흔들리면 낭패다. 긴장을 풀고 후한 점수를 줬다간 상대평가 비율을 맞출 수 없다. 냉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평가를 내려야 한다.

채점이 가장 괴로운 이번 학기 수업은 ‘서사적 체육’이다. 몸으로 스포츠를 직접 경험하고 글쓰기를 통해 경험을 성찰하는 교양체육 수업이다. 예를 들면, 실내암장에서 암벽등반 수업을 하고 손가락, 발가락 끝에 온 몸의 체중을 싣고 후들거릴 때 느끼는 무력감에 대해 토론하고 글을 쓴다. 벽면에 붙어 있을 때 체중을 안정적으로 분산할 수 있는 삼각형에 대해 배우고 다음 단계로 오르기 위해서 그 안정을 깨야하는 모순에 대해 깨닫는 식이다. 말로 배우는 게 아니라 실제 땅으로 떨어져 충격을 느껴보면서 몸으로 받아들이는 배움이다. 이런 땀의 성찰들이 쌓여있는 과제들을 읽고 나는 매정한 점수를 부여해야 한다. 그들이 축적한 성찰의 깊이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과연 그 성찰의 두께를 C+, B-, A0라는 잣대로 잴 수 있을까?
첫 시간은 걷기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걷기를 순례(pilgrimage)라 하고, 목적이 없는 걷기를 방랑(vagabond)이라 이름 지었다. 필그림보다는 배가본드가 돼 어디를 향해 걷는 게 아닌 걷기 그 자체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난생처음 해보는 경험이다. 매 신년 목표를 다이어트로 잡고 PT( Personal Training)와 식단관리 그리고 요요(에 동반된 자괴감)를 반복하던 여학생은 이 기묘한 체험을 통해 목적 없는 삶이 부여해주는 즐거움을 발견했단다. 남들 때문에 살을 빼는 게 아닌 내가 즐거워서 스스로 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중간고사는 2주간의 몸의 성찰, 일명 ‘단단해지기’다. 현재 몸상태를 인바디 기계로 측정하고 체계적인 트레이닝과 식사조절을 통해 단단해지기를 실현하는 과제다. 실제로 웨이트트레이닝이나 크로스핏을 통해 근육의 부피와 강도를 높이는 학생도 있다. 그러나 중간고사 기간과 겹치는 악조건으로 인해 약 8할 정도는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다. 밤을 새워 시험공부를 하다 야식의 유혹에 넘어가고 축제 기간에 친구들과 어울려 과음하기 일쑤다.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은 중간과제의 의도는 미리 가르쳐주지 않는다. 근육의 단단해지기를 위해 노력하다가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기가 더 어렵다는 걸 그리고 그게 먼저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은 학생이 여럿이다.

마지막 과제는 지금 난감하게 읽고 있는 ‘나의 스포츠스토리’다. 삶의 지난 행적을 잘 들여다보고 스포츠와 관련된 삶의 한 부분을 떼어내 집중적으로 글을 쓰는 숙제다. 연관된 물건을 하나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가 왕따를 당하다 축구로 친구들과 소통을 시작했던 한 학생은 다 떨어진 축구화를 가져왔다. 축구가 너무 하고 싶은데 남자아이들과 할 수 없어서 아예 여자축구단을 결성한 여학생은 새로 맞춘 축구유니폼을 가져왔다. 아버지와 어릴 적 야구공을 던지고 받던 추억을 떠올리며 헤진 글러브를 가져온 학생도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잊혔던 기억을 소환하고 각자의 삶에 체육적 서사를 완성한다.
내일은 성적입력 마지막 날이다. 큰 숨 한 번 들이킨다. 안면 몰수하고 매정한 판정을 할 시간이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문소정 기자 moon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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