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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하늘 아래 쫓기지 않는 명문 없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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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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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부탁받은 뒤 일주일이 흘렀는데도 글고리가 잡히지 않는다. 마감날 아침까지 한 줄도 시작하지 못한 채 오래전에 약속된 장거리 답사일정을 위해 길을 나섰다. 옳거니! 이것을 글감으로 사용하면 되겠다. 갑자기 무겁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런데 일간신문이라 기다려줄지 모르겠다. 기차역으로 출발하면서 담당자에게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낼 아침까지 마감해도 되는지요?” 답장이 오지 않는다. 설사 약속을 못 지켰다 할지라도 문자까지 모른 체 할 일은 아닐 텐데. 어쨌거나 답사일정을 소화한 후 어둑해질 무렵 도착한 광주송정역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또 문자를 보냈다. 역시 묵묵부답이다. 이미 예비 원고로 지면을 채운 것일까? 그렇다면 괜히 수고롭게 밤을 새워가며 애쓸 필요가 없겠지. 나이 탓인지 예전과 달리 밤샘하면 그 후유증이 며칠씩 가는데. 확인을 위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벨이 한참동안 울렸지만 받지 않는다. 끊었다. 심란하다. 조금 후 전화가 왔다. “낼 아침까지 마감해주시면 됩니다. 문자로 답장했는데 안들어갔나 봐요.” 011과 010 상호 호환에 잠시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기계가 인간을 이간질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열차가 서울을 향해 출발하자마자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남도 답사길에서 느꼈던 이런저런 일을 가로 세로로 대충 얼개를 엮었다. 예전에 읽었던, 답사와 관련된 책도 기억에 의존해 더듬고, 섬광같이 지나가는 광고문 같은 말도 조미료처럼 뿌렸다. 내용을 다소 과장하고 부풀리고 꾸미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어느새 한강철교 위다. 덜커덩거리는 금속성 바퀴 소리가 울린다. 메모를 보충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까닭에 기차 안과 집안이 결코 다른 공간이 아니었다.
바쁜 마음으로 숙소에 도착하니 밤 12시 무렵이다. 씻는 시간도 아까운지라 모든 것을 생략했다. 노트북을 열고 메모지를 펼쳤다. 영가현각(637~713) 선사는 육조혜능(638~713) 대사를 만나 하룻밤 사이에 안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후학들은 ‘일숙각(一宿覺)’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오늘 졸지에 하룻밤에 글 한 편을 짓는 ‘일숙문(一宿文)‘이 탄생할 형편이다. 사실 시간이란 양이 아니라 질이 더 중요한 법이다. 열두 시간을 한 시간처럼 사용할 수도 있지만 한 시간을 스물네 시간처럼 쓸 수도 있다. ‘하늘 아래 쫓기지 않는 명문이 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부지런히 자판을 두들겼다.

한밤중을 지나 새벽녘을 거쳐 출근시간조차 삼십분을 넘길 무렵 겨우 마감했다. 그야말로 비몽사몽간에 숙제를 마친 것이다. 데스크의 손을 거친 덕분에 이튿날 ‘바쁜 티’ 안나게 매끈한 문장으로 지면을 장식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같이 답사했던 일행들이 “어떻게 하룻밤 만에 쓸 수가 있나? 미리 써둔 글이 아닌가?”라는 농담같은 대화를 했다는 뒷말까지 전해 들었다. 몇 년 전 동국대 총장과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가산지관(1932~2012) 스님께서 열반했을 때 추모글을 청탁받고 이틀만에 마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편을 완성한 시간이 개인적으로 가장 짧았다. 본래 추모글은 긴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감안하더라도 그 기록을 경신한 까닭에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됐다.

신춘문예에 응모한 많은 시인들이 당선작을 발표하기도 전에 미리 당선 소감을 써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선 소감이 응모작보다 훨씬 뛰어난 경우가 많다. 신간을 구입할 때마다 머리말 혹은 후기를 가장 먼저 읽는다. 작가의 내면살림과 그 책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말 역시 마지막에 쓴다는 점에서 후기나 같다. 어떤 책이건 머리말은 본문 전체를 꿰뚫는 명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서문만 모아 따로 책을 만들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저서가 된다. 학인 시절에는 경전의 서문만 모아 다시 편집한 ‘제경서문(諸經序文)’을 과외로 배웠다. 물론 그 정도의 명문인 서문 혹은 후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그저 후일담 삼아 후기 같지 않는 후기를 남기게 된 것이다.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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