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서울을 향해 출발하자마자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남도 답사길에서 느꼈던 이런저런 일을 가로 세로로 대충 얼개를 엮었다. 예전에 읽었던, 답사와 관련된 책도 기억에 의존해 더듬고, 섬광같이 지나가는 광고문 같은 말도 조미료처럼 뿌렸다. 내용을 다소 과장하고 부풀리고 꾸미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어느새 한강철교 위다. 덜커덩거리는 금속성 바퀴 소리가 울린다. 메모를 보충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까닭에 기차 안과 집안이 결코 다른 공간이 아니었다.
한밤중을 지나 새벽녘을 거쳐 출근시간조차 삼십분을 넘길 무렵 겨우 마감했다. 그야말로 비몽사몽간에 숙제를 마친 것이다. 데스크의 손을 거친 덕분에 이튿날 ‘바쁜 티’ 안나게 매끈한 문장으로 지면을 장식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같이 답사했던 일행들이 “어떻게 하룻밤 만에 쓸 수가 있나? 미리 써둔 글이 아닌가?”라는 농담같은 대화를 했다는 뒷말까지 전해 들었다. 몇 년 전 동국대 총장과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가산지관(1932~2012) 스님께서 열반했을 때 추모글을 청탁받고 이틀만에 마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편을 완성한 시간이 개인적으로 가장 짧았다. 본래 추모글은 긴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감안하더라도 그 기록을 경신한 까닭에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됐다.
신춘문예에 응모한 많은 시인들이 당선작을 발표하기도 전에 미리 당선 소감을 써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선 소감이 응모작보다 훨씬 뛰어난 경우가 많다. 신간을 구입할 때마다 머리말 혹은 후기를 가장 먼저 읽는다. 작가의 내면살림과 그 책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말 역시 마지막에 쓴다는 점에서 후기나 같다. 어떤 책이건 머리말은 본문 전체를 꿰뚫는 명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서문만 모아 따로 책을 만들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저서가 된다. 학인 시절에는 경전의 서문만 모아 다시 편집한 ‘제경서문(諸經序文)’을 과외로 배웠다. 물론 그 정도의 명문인 서문 혹은 후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그저 후일담 삼아 후기 같지 않는 후기를 남기게 된 것이다.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꼭 봐야할 주요뉴스
"살 빼려고 맞았는데 아이가 생겼어요"…난리난 '...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