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햇살 따뜻한 남쪽 통영의 푸른 바다에서 그를 느낀 적이 있다. 기념관 홀에 선 채로 <낙양>의 아득한 선율에 한참 마음을 맡겼다. 39살 때 독일로 떠나서 78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국땅에서 보낸 세월 내내 아름다운 고향의 소리는 그의 마음에 사무쳤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이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의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거리와 생가, 심지어 음악제에서 그의 이름을 지울 것을 강요한 야만의 레드 콤플렉스, 그것이야말로 분단과 냉전이 낳은 가장 깊은 적폐 아닐까.
불길한 첫 만남은 3년 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됐다. 1967년에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렀는데,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고문에 굴복할 수 없었던 윤이상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책상 위의 묵직한 유리 재떨이로 자신의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강타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철철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서 벽에 유언을 썼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인류의 지성과 문화를 부정하는 한국 군부의 폭거에 세계의 음악가들이 팔을 걷어붙였고 박정희는 윤이상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이상은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들이 누구인지 여실히 목격하였다." 진정한 예술가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며, 온몸으로 끌어안고 내적으로 성숙시켜 예술로 꽃피운다. 윤이상은 5.18의 참상을 듣고 몸부림치며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87년에는 남쪽 시인들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평양에서 초연했다. 고향 땅을 밟고 싶었고, 음악으로 민족을 하나되게 만들고 싶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그의 입국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너무 몰랐다. 무엇보다, 그를 분단의 감옥에 가뒀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자기 땅에서 유배된 예술가, 분단의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한의 한반도를 끌어안고 울부짖은 윤이상…. 그를 레드 컴플렉스에서 풀어주기 전에는 우리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윤이상 탄생 100년, 이제 자랑스런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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