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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무치(無恥)의 시대를 건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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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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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개강 첫날 늦게까지 이어진 회식 자리. 오른팔 전체가 저려오더니 갑자기 바늘로 찔린 듯 아프다. 갑작스런 그러나 명백한 고통의 강도에 놀라 팔을 걷어 보니 붉은 반점이 여기저기 퍼져있다. 친절한 네이버 씨에게 '오른팔이 바늘에 찔린 듯 아플 때'라고 물었다. 면역력이 떨어질 때 치킨팍스 바이러스가 다시 활성화되는 대상포진이란다. 그래 힘들긴 힘들었구나. 방학 내내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다 쉴 새 없이 다시 새 학기를 시작하는 사태를 마주한 몸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몸은 건강의 총체적 위기를 급작스런 고통으로 알리고 있었다. 고통을 느낀다는 건 역설적으로 아직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시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너무 늦기 전에 알려줘 고맙기도 하다.

'그래 천천히 쉬엄쉬엄 비우고 살아야지'라고 다짐을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번번이 나의 결심을 무색하게 만든다. NBA 농구를 즐겨 본다는 북한의 김정은은 6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유도 선수 출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40분 늦게 나타났다.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MBC 김장겸 사장은 잠적했다가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출두해 12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고 이런 일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며 피켓을 든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국회등원을 거부했다.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은 우즈베키스탄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국민들에게 답답함을 선사하며 러시아 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정지었고 신태용 감독이 헹가래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히딩크 감독이 다시 국가대표팀을 맡을 수도 있다는 추측성 기사들이 솔솔 올라온다.
즐거운 사라 덕분에 인생의 대부분을 즐겁지 못하게 살았던 마광수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뉴스 밑 자막으로 유작을 모아 단편집을 출판한다는 추모를 가장한 홍보성 기사가 깔리고 있다. 나를 가장 크게 흔든 사건은 단연 부산에서 일어난 여중생들의 집단 폭행 사건이다. 앳된 여학생들이 떼로 한 학생을 끌고 가 처참하게 폭행한 것도 끔찍하지만 이를 나무라는 세상을 향해 그들이 보인 반응은 더욱 놀랍다.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범죄행위를 일종의 놀이로 여기는 그들의 단톡방 대화내용과 자신들의 폭행 장면을 실시간으로 촬영해 돌려보면서 낄낄거리는 모습에 기성세대는 경악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두꺼운 얼굴을 장착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의기양양해 하는 김정은, 정상회담에 늦게 나타나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앉은 푸틴, 언론을 유린한 공범자 중 공범자이면서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언론탄압을 운운하는 김장겸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 단 두 경기를 치룬 감독을 두고 히딩크를 떠올리게 하는 기사나 마광수 교수의 죽음을 이용하는 출판홍보는 모두 우리 시대가 상실한 하나의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부산의 여중생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뻔뻔했고 심지어 당당했다. 무치의 만연은 더 이상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징후로 해석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집단적으로 상실한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건너야 할까? 우선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몸은 자신의 위기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친구들에게 처참하게 맞아 부어오른 얼굴을 마주할 때, 혹은 사드배치를 막으려 몸부림치는 시민들의 모습을 목격할 때 몸의 한 부분에 미세한(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대상포진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무치의 바이러스에 감염됐을지 모른다. 대상포진은 72시간 내에 항바이러스 주사를 맞아야 효과가 있다. 내일은 나도 꼭 주사를 맞아야겠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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