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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내력을 감춘 골짜기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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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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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포항시 청하면 유계리에 있는 법성사(法性寺) 가는 길은 낯설다. 찻길마저 없다. 버스가 멈춘 자리에서 가산지관(1932~2012) 대종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행들 속에서 함께 걸었다. A연구원은 고대 희랍의 소요학파는 걸으면서 사색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 마디 보탰다. 오늘은 우리가 소요학파의 후예가 되는 셈이다. 불멸의 역경가 구마라집(344~413) 스님도 인도말로 된 경전을 한문으로 옮길 때 글이 막히면 그것이 뚫릴 때까지 걸으면서 생각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그래서 머무는 곳을 소요원(逍遙園)이라고 불렀다. 걸어야 만사가 풀린다. 건강도 풀리고 번뇌도 풀린다. 길은 좁았지만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숲길이라 진초록 나뭇잎들이 따가운 초여름의 햇볕을 가려준다.

딱히 볼 만한 것은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들을만한 사연과 내력을 감춘 곳이다. 당신께서 2010년 마지막으로 이 길을 걸었다. 10대 때 열병으로 아버지 등에 업혀 이 길을 처음 지나간 뒤 수십년만에 다시 걷는 길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이 절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부친은 아들을 위해 이 길 따라 쌀과 부식을 지게로 날랐다. 부자가 함께 했던 길이였기에 당신께 더욱 각별한 감회로 닿아왔으리라. '옴마니반메훔' 기도를 통해 병이 낫는 영험을 입었다. 그 인연으로 해인사로 출가했고 이후 해인사 주지, 동국대 총장,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경전과 금석문의 대가로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당시 경주 이씨 집안의 먼 친척 어른이 그 절의 주지였다. 덕분에 쇠한 몸을 보다 쉬이 의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친족의 그늘은 시원하다. 석가족은 나의 잎이요 나뭇가지다"라고 했던 붓다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선 세종 때 신미스님도 동생인 김수온이 집현전 학사로 근무한 인연으로 대궐을 드나들며 한글창제에 힘을 보탰고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도 형인 현준대사가 해인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자기집 정원처럼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었다.

답사의 길라잡이 역할을 자처한 친족 거사가 전해준 말도 들을 수 있었다. 70여년 전 이 절은 대웅전조차 초가였다. 훗날 절을 수리하고 기와로 바꿀 때 집안어른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탰다고 한다. 그야말로 동네절이요 문중절인 셈이다. 구전도 여럿이 들으면 그대로 역사가 된다. 그 시절엔 절이름도 제대로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그냥 '황배기골 절'이라고 불렀다. 몇년 전 법성사로 부임한 주지스님은 도량을 정비하고 길을 다듬고 가파른 곳에 잔도(棧道)를 설치하느라고 승복을 입을 틈조차 없었다고 했다. 늘 작업복차림인지라 처음 온 사람들은 일꾼인줄 안다면서 멋쩍게 웃는다. 오늘은 삭발하고 깨끗한 승복으로 갈아입은 말쑥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절마당에 쪼그리고 앉은 채 B연구원에게 이미 수집된 또다른 구전을 들었다. 인근 마을에 '벼루가 빵꾸난' 훈장이 살고 있었다. 십리 안의 초상집 만장을 쓰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동시에 대서소도 겸했다. 동네의 온갖 편지를 읽어주고 대필하고 공문서를 처리해준 어른이다. 벼루가 닳아 구멍이 날만큼 열심히 먹을 갈았던 탓에 그런 별호가 붙었다. 그 집으로 다니면서 한문을 배웠다. 글을 배우겠다는 간절함 때문에 훈장님이 아침을 드시기도 전에 문 앞에서 기다리다 안주인과 마주쳐 무안함을 감춰야 했던 일도 잦았다. 이런 노력들이 뒷날 대학자가 된 씨앗이었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동네자리에는 저수지가 들어섰고 겨우 수몰을 면한 생가터에 보은원(報恩園)이라는 조그만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그 자리에 당신이 직접 설계 시공하고 글을 지은 '고향방문기념비'에는 탯자리를 찬탄하는 문장이 끝없이 이어진다. 출가 전과 출가 후를 이어주는 성지를 찾은 후학들은 정성 다해 향을 올렸다. 사람은 가도 향기는 여전히 남는 법이다.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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