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볼 만한 것은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들을만한 사연과 내력을 감춘 곳이다. 당신께서 2010년 마지막으로 이 길을 걸었다. 10대 때 열병으로 아버지 등에 업혀 이 길을 처음 지나간 뒤 수십년만에 다시 걷는 길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이 절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부친은 아들을 위해 이 길 따라 쌀과 부식을 지게로 날랐다. 부자가 함께 했던 길이였기에 당신께 더욱 각별한 감회로 닿아왔으리라. '옴마니반메훔' 기도를 통해 병이 낫는 영험을 입었다. 그 인연으로 해인사로 출가했고 이후 해인사 주지, 동국대 총장,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경전과 금석문의 대가로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답사의 길라잡이 역할을 자처한 친족 거사가 전해준 말도 들을 수 있었다. 70여년 전 이 절은 대웅전조차 초가였다. 훗날 절을 수리하고 기와로 바꿀 때 집안어른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탰다고 한다. 그야말로 동네절이요 문중절인 셈이다. 구전도 여럿이 들으면 그대로 역사가 된다. 그 시절엔 절이름도 제대로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그냥 '황배기골 절'이라고 불렀다. 몇년 전 법성사로 부임한 주지스님은 도량을 정비하고 길을 다듬고 가파른 곳에 잔도(棧道)를 설치하느라고 승복을 입을 틈조차 없었다고 했다. 늘 작업복차림인지라 처음 온 사람들은 일꾼인줄 안다면서 멋쩍게 웃는다. 오늘은 삭발하고 깨끗한 승복으로 갈아입은 말쑥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절마당에 쪼그리고 앉은 채 B연구원에게 이미 수집된 또다른 구전을 들었다. 인근 마을에 '벼루가 빵꾸난' 훈장이 살고 있었다. 십리 안의 초상집 만장을 쓰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동시에 대서소도 겸했다. 동네의 온갖 편지를 읽어주고 대필하고 공문서를 처리해준 어른이다. 벼루가 닳아 구멍이 날만큼 열심히 먹을 갈았던 탓에 그런 별호가 붙었다. 그 집으로 다니면서 한문을 배웠다. 글을 배우겠다는 간절함 때문에 훈장님이 아침을 드시기도 전에 문 앞에서 기다리다 안주인과 마주쳐 무안함을 감춰야 했던 일도 잦았다. 이런 노력들이 뒷날 대학자가 된 씨앗이었다.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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