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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블랙리스트 악몽,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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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비평가

이채훈 클래식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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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6월8일은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최초의 자유음악가가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1781년 오늘 잘츠부르크의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의 부관 아르코 백작은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차 궁정에서 내쫓았다. 모차르트는 이날부터 1791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10년 동안 최고의 걸작들을 인류에게 선사하게 된다.

당시 음악가는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릴 수 없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잘츠부르크에 부임하자마자 모차르트의 기강을 잡으려 했다. 대주교가 요구하는 곡을 쓸 수 있도록 언제나 대기할 것,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허락받을 것…. 모차르트에게 이 규칙들은 참을 수 없는 속박이었다. 대주교는 "하인의 의무를 다하면 급료를 세배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모차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이미 6살부터 유럽의 왕실을 누비며 재능을 발휘해 온 모차르트 아닌가.
모차르트는 파리, 로마, 뮌헨 등 큰 도시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찾고자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꼬마 신동 모차르트에게 열광했던 유럽 귀족들은 어엿한 대가(大家)로 성장한 모차르트를 알아주지 않았다. 1780년말 모차르트는 뮌헨에서 '이도메네오'를 공연하려고 한달 휴가를 얻었는데, 작업이 길어져서 두 달을 넘기고 말았다. 새 황제 요젭2세의 취임식에 참석하려고 빈(Wien)에 머물던 콜로레도 대주교는 뒤늦게 일행에 합류한 모차르트를 향해 "불한당, 후레자식, 배은망덕한 놈" 등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모차르트는 "제가 맘에 안 들면 해고해 달라"고 응수했다. 대주교는 "너는 내 휘하에서 예절을 배워야 한다"며 잘츠부르크로 가서 대기하라고 명령했고, 모차르트는 이 '대기발령'을 거부한 채 빈에 머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파국의 날이 다가왔다.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찬 것은 생계수단을 박탈하겠다는 사형선고였다. 음악 시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 자유음악가라는 전인미답의 길에 내던져진 것은 천하의 모차르트에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마술피리' 등 오페라로 구체제를 비판한 결과 지배층의 미움을 사서 경제난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시대를 초월해서 인류의 사랑을 받게 됐다. 궁정사회는 몰락하고 시민사회가 밝아왔다.

블랙리스트로 양심적인 예술가들을 배제하고 문화계를 피폐하게 만든 이들이 감옥에서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는 흡사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차 궁정에서 쫓아낸 18세기 귀족들의 폭력을 닮았다. 대놓고 엉덩이를 걷어차지 못하는 시대인지라, 1만명에 가까운 예술인의 명단을 몰래 작성해서 밥줄을 끊으려 한 비열한 음모였다. 겨우내 타오른 촛불의 힘은 부도덕한 권력자들을 침몰시켰고, 자유로운 예술가들이 다시 숨 쉴 수 있게 했다.
지난 주 서울국제음악제 프리콘서트인 에머슨 4중주단 연주회에 앞서 음악제 후원자들을 위한 리셉션이 열렸다. 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인 작곡가 류재준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지난해 정부의 재정지원이 갑자기 끊기자 사비를 들여서 가까스로 음악제를 치러야 했다. 이해하기 힘든 정부의 태도 변화가 블랙리스트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제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그 후유증으로 병까지 얻어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가 과거의 활기를 되찾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블랙리스트의 상처는 그만큼 크고 깊었던 것이다. 아무튼 서울국제음악제가 올 가을 정상적으로 열릴 예정이라 정말 다행이다. 국가가 '작은 모차르트'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배제하는 블랙리스트의 악몽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이 나라가 드높은 '문화의 힘'이 넘치는 아름다운 나라로 거듭나기를 꿈꾸어 보는 6월8일이다.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ㆍ클래식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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