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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금융산업에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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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로 전 외환은행장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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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의 중심지 월가가 위치한 뉴욕의 맨해튼 거리를 걷다 보면 뱅크오브아메리카나 골드만 삭스 같은 대형 금융회사도 접하게 되지만 전당포나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점포(check cashing)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띤다. 금융선진국에서 만나는 이색풍경이다. 하지만 초대형 금융회사들과 조그만 회사들이 혼재하는 모습에서 미국 금융산업이 왜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금융은 국민경제에서 자금의 잉여부문과 부족부문을 연결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이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금융회사가 존재한다. 아무리 볼 품 없어 보이는 금융관련 회사도 해당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과 시장이 있기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자유시장경제 철학은 고객과 시장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나 금융회사가 자연 발생하듯 생겨나 작동하고 정부는 금융시스템에 문제를 가져올 정도의 큰 위험이 있을 때에만 개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은행감독체계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미국은 건국 이후 중앙은행도 없었고(중간에 잠깐씩 있었지만) 연방정부차원의 은행감독도 하지 않았다. 강력한 정부를 싫어해서 만든 나라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설립되면 경제 권력이 집중돼 거대한 괴물(?)이 될 것을 우려했다.

초기 은행들은 주정부의 인가를 받아 영업했는데 이를 주법은행(state bank)이라고 부른다. 당시 은행들은 개별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민은 어느 은행권이 제대로 가치가 있는 돈인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신문마다 매일 은행권의 가치를 보도하는 기자가 있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어느 은행의 1달러는 다른 주에서도 1달러로 교환되지만 어떤 은행권 1달러는 (신용도가 떨어져서) 70센트에 거래된다는 식이다. 한적한 곳에 은행을 만들고 은행권을 발행한 후 없어지는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1800년대 초반시대를 들고양이 은행시대(wildcat banking period)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전쟁비용을 마련해야 했던 정부는 통화감독청(OCC)을 설립하게 된다. 통화감독청은 은행인가권을 가졌는데 그 인가를 받은 은행이 국법은행(national bank)이다. 아울러 주법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에 대해서는 세금이 부과됐기 때문에 이때부터 사실상 국법은행이 은행권 발행을 주도하게 됐다.

19세기 중에도 금융위기가 계속 반복되자 1913년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만들어지고 대공황 이후 확대 개편됐다. 또한 뱅크런을 막기 위해 1933년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설립돼 예금보험제도가 도입돼다.

현재 미국의 은행은 국법은행과 주법은행으로 나뉜다. 은행을 설립하려면 통화감독청이나 주 은행감독당국 중 선택해서 인가를 받으면 된다. 주법은행이었다가 국법은행으로 바꿀 수도 있고 반대로도 가능하다. 은행감독은 주법은행의 경우에는 주 정부, 연방준비제도와 연방예금보험공사가 수행한다. 국법은행은 통화감독청과 연방준비제도, 연방예금보험공사의 감독을 받게 된다.

은행에 대한 감독이 여러 기관에서 중복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대한 비판도 많다. 하지만 그 감독기관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 사건이나 교훈을 되새겨 보면 나름의 필요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론 현실에서는 감독기관간의 협의에 의해 금융회사의 부담을 완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의 은행산업은 미리 그려진 청사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외국의 제도를 도입해서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우리의 제도와는 다른 측면인 것이다. 특히 다소의 문제가 있더라도 시장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참으로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미국의 컨설팅업체 금융서비스이노베이션센터(CFSI)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미국인 중 자신의 금융수요에 맞는 상품에 접근하기 어려운 소비자가 6700만 명(2015년 기준)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제대로 된 금융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은행에 계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봉급으로 받는 수표를 입금하지 못하기 때문에 점포에 가서 수수료를 내고 현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금융의 중심 도시 한복판에도 그런 점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점포의 수수료가 높다고 과도하게 개입하게 되면 그런 서비스는 줄어들고 결국 피해는 고객에게 돌아갈 수 있다.

서비스의 제공과 그 서비스의 가격 등 품질은 모두 고객을 위한 것이다. 외부의 개입이 없으면 서비스는 제공되지만 품질은 낮아질 수 있다. 하지만 서비스에 대한 과도한 개입은 서비스 제공의 축소를 가져올 수 있다. 어떤 것이 소비자에게 좋은지는 꼼꼼한 고려가 필요한 것 같다.

또 소비자는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니즈(needs)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품이 필요하다. 둥근 공으로 커다란 상자를 채운다면 큰 공으로 모두 채울 수는 없는 것과 같다. 큰 공, 중간 공, 작은 공으로 넣고 그래도 남는 틈은 작은 모래로 채워야 한다. 맨해튼에서 본 수표현금화점포는 그런 모래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에도 모래 같은 역할을 하는 금융회사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을 너무 규격화해서 은행 수준으로 만들어가는 경향이 지속되고 있다. 다양성을 없애는 사회는 발전하기 어려운 것처럼 다양한 회사의 서비스를 억제하는 것은 금융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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