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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블루클럽/이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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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저녁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 나의 텅 빈 시선 끝에, 그곳은 심해에 내려진 어항처럼 홀연히 떠올랐다. 방파제 바깥을 응시하는 밍크고래의 매끄러운 뱃살을 닮은 푸른 간판에 손을 댔을 때에 나의 동공에는 사막에 세운 조화의 두껍고 매끈한 이파리들이 부유했다. 그 적막한 클럽 안에서는 반짝이는 은빛 도구들이 부딪는 차가운 소리만이 간간이 흘러나올 뿐, 비스듬한 의자들의 미간에는 표정이 없었다. 맞지 않는 틀니처럼 생경한 삶과 결별하고자 낯선 빛살로 가득한 그 해연에 내려앉으니, 빛나는 머리칼을 말끔히 빗어 넘긴 그곳의 과묵한 현자는 한 달 동안 자란 나의 미망을 무심히 잘라 내어 바닥에 흩뿌릴 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내가 고백하려 할 때에,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후 내 몸에 걸린 수도자의 푸른 도포를 냉정하게 거두었다. 안경을 벗긴 채로 몇 분 사이 거울 앞의 생을 가늠하려 한 나를,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다시 캄캄한 성간으로 돌아갔다.


[오후 한 詩]블루클럽/이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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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앞부분을 읽을 적에는 '블루클럽'이 어느 후미진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그렇고 그런 술집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찬찬히 짚어 보니 그곳은 가격이 좀 싼 편이고 동네마다 있는, 주로 남자들이 가는 이발소였다. 그곳에서 시인은 이발을 하는 동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발사는 "한 달 동안 자란" "미망을 무심히 잘라 내어 바닥에 흩뿌릴 뿐", 이발이 끝나자 "냉정하게" "다시 캄캄한" 세상 속으로 시인을 돌려보낸다. '블루'는 우울하고 차가운 색이다. 나는 이 시를 읽고 나도 모르게 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를 한동안 중얼거렸다. 왜인지는 알겠는데 쓰자니 참 슬프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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