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빚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양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가름은 당장 곤경에 처한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지어는 재벌마저도 빚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빚의 유무만으로 우리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일은 무망하다. 이보다는 빚을 상환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누는 것이 더 합리적인 듯 보인다. 빚을 상환할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는 능력과 가능성의 문제다. 그리고 이것이 신용의 정체다. 그런데 사유의 틀을 빚의 상환 능력이나 가능성에 한정하는 일은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은 포기한 채 각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금융자본주의에서 권력이 발생하는 지점은 빚의 유무나 그 상환 능력 혹은 가능성의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요소들은 '신용'이라는 환상을 강화하고 우리를 죽을 때까지 '부채 인간(homo debitor)'으로 육성할 뿐이다. 니체는 도덕의 근본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죄(Schuld)'가 '빚을 진 것(Schulden)'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거꾸로 말하자면 금융자본주의에서 채권-채무의 관계 곧 권력은 도덕의 상실과 관련이 있다. 빚을 갚지 못하는 상태가 비도덕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 자신 또한 국가와 사회와 이웃에게 빚지고 있다는 도덕이 없을 때 비로소 무소불위의 악마가 된다는 뜻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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