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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빚의 역사/서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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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출은 처음은 단순한 착오로 생겼다. 숫자를 하나 더 썼다던가 서류가 한 장 빠졌다던가 하는 그런 일이다. 일단 계좌에 입금이 되니 신용에 따라 쓸 일이 갑자기 늘어났고 일단 있으면 써야만 해서 쓴다, 쓸 수밖에 없었다. 일단 쓰고 나니 그 빚은 영원한 빛이 되었다. 눈부신 역사를 따지고 들자면 그렇긴 하지만 큰 오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계좌는 몇 번 바뀌었고 납입 예정일도 월초나 월말로 가끔씩 옮겨 갔지만 납입 예정 금액이 줄거나 하진 않는다. 새해 복떡(1kg)을 선착순으로 가끔 나눠 주곤 했지만, 받으러 창구에 갈 생각은 없었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대출 만기일은 연장되었다. 상환 예정 계획은 없다. 단순한 착오는 아니었던 것이다. 신용 약관은 갱신되었고 금리는 시장에 맞춰 변동되었다. 합법적인 테두리 안이니 쓸 수밖에 없었다. 몇 서류를 더 준비했더니 이젠 편하게 무인 자동화 기기에서 숫자를 하나 더 쓴다던가 일단 계좌에 입금을 납입 예정일에 맞춰 만기를 요구하며 짜증과 오류와 역사를 생각하는 창구가 오류였다. 역사를 다시 조명해 봐도 이러저러한 가설이 갑자기 늘어나고 몇 개가 분열되었다. 쓸 수밖에 없다, 처음은 단순한 착오였으나 역시, 역사의 흐름에 맞춰 다시 보니 그저 필연이었다. 영원한 빚, 참 아름다운 신용이다.

[오후 한 詩]빚의 역사/서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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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빚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양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가름은 당장 곤경에 처한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지어는 재벌마저도 빚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빚의 유무만으로 우리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일은 무망하다. 이보다는 빚을 상환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누는 것이 더 합리적인 듯 보인다. 빚을 상환할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는 능력과 가능성의 문제다. 그리고 이것이 신용의 정체다. 그런데 사유의 틀을 빚의 상환 능력이나 가능성에 한정하는 일은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은 포기한 채 각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금융자본주의에서 권력이 발생하는 지점은 빚의 유무나 그 상환 능력 혹은 가능성의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요소들은 '신용'이라는 환상을 강화하고 우리를 죽을 때까지 '부채 인간(homo debitor)'으로 육성할 뿐이다. 니체는 도덕의 근본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죄(Schuld)'가 '빚을 진 것(Schulden)'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거꾸로 말하자면 금융자본주의에서 채권-채무의 관계 곧 권력은 도덕의 상실과 관련이 있다. 빚을 갚지 못하는 상태가 비도덕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 자신 또한 국가와 사회와 이웃에게 빚지고 있다는 도덕이 없을 때 비로소 무소불위의 악마가 된다는 뜻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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