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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플라즈마/정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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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 의자에 앉아 폐전구를 씹는 소년, 눈길이 닿는 곳마다 어둠이 밀려난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고철 사이에서 눈을 뜨고 있는 희망을 이해할 수 없다
손가락이 모자라면 팔로 팔이 모자라면 어깨로 소년은 짐을 나른다

그림자가 그늘을 빠져나가고 있지만 나뭇잎이 온몸을 떨고 있지만

보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젖은 장갑을 낀 채 절단기 속으로 몸이 반쯤 잠긴 소년, 말없이 밥을 먹던 가족을 떠올렸다

하나로 뭉칠 수 없는 것

빈 의자에 앉아 골목을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무게가 나를 응시하는 것 같다

손가락이 담긴 장갑이 하수구를 지나는 밤

어느 골목으로 빠져나갈지 모르지만 어떤 향기를 피워 올릴지 모르지만

소년은 끝나지 않는 현실처럼
나의 체온이 된다

■아프다. 아픈 시다. 이렇게 아픈 시를 읽고 있으면 나 자신이 부끄럽다. 며칠 전 꽃 핀 길을 흐뭇하게 걸은 게 부끄럽고, 꽃이 피었는데 비 내린다고 술을 마신 게 부끄럽다.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과 꽃이 지면 어쩌나 걱정한 게 부끄럽다. 마냥 부끄럽다.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당장의 내가 부끄럽다. 아니 부끄러워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부끄럽다는 말로 그칠까 봐, 안심할까 봐, 어젯밤 어딘가에서는 "손가락이 담긴 장갑이 하수구를 지나"고 있었을 텐데 "끝나지 않는 현실"을 앞에 두고서 또 슬며시 눈을 감을까 봐. 가끔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많다. 우리의 평안하고 안온한 삶이 얼마나 부끄러울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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