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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나의 아름다운 사전/박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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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얼음을 만져 볼 수 없지만 나의 사전에는 자주 냉기가 다녀간다 나의 오감이 실패한 단어를 나의 사전이 대신 닿는다 그러니까 나무 안에 흐르는 물이 내 사전의 일이다

나의 모국어를 읽을 수 있는 대륙까지가 이 사전의 가능성이겠지만 멀리, 반도를 버린 무덤들도 무간으로 사전에 드나든다 문장도 사전에 정박할 수 있는 이유다
푸른 송곳을 들고 한 남자가 자주 다녀간다 그 남자의 하루가 모르는 숲에서 혼자 쓰러지는 나무일지라도 그건 나의 사전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 사람 키냐르 집 앞 욘 강에 자주 시선이 빠지는 것도 죽은 사람들이 다시 푸른 눈빛으로 문장을 던지고 가는 것도 나의 사전의 일은 아니다

사전을 수첩이라 부르는 여자의 눈에서 다친 물고기를 건지는 일도 있다 어떤 날은 사전만 바라봐도 몸이 흐리다 나의 사전은 나의 신체를 흐르는 것이다 사전을 잃어버릴 때마다 악천후가 신체로 드나들었지만 나의 죄 없는 부주의는 그때마다 다른 기후로 이주했다

이 사전이 끝날 때 모든 말들이 일어나 나의 한때를 버릴 것을 안다 폐허에서 무너진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이 나의 사전의 이름이다
[오후 한詩]나의 아름다운 사전/박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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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은 단어들의 뜻을 적은 책이다. 각각의 단어는 대개 고유한 뜻을 가진다. 우리는 단어를 통해 사전에 적힌 뜻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소통한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어떤 단어들은 사전의 뜻과는 별개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내게 '비둘기'는 새가 아니라 기차의 이름이고 그래서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외할머니를 뵈러 가던 기억과 겹친다. 그리고 '넝쿨장미'는 꽃의 이름이 아니라 짝사랑하던 여자의 집 앞에 무심히 피어 있던, 아니 아무리 바라봐도 내 눈길을 거부하던 활활 타오르는 냉기였다. 그리고 '선데이 서울'은 처음엔 그저 딱지 접기용 종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차차 거부할 수 없는 밀교의 성전이 되었다. 그렇게 어떤 단어들 속엔 "나의 한때"가 배어 있다. 그것이 비록 지금-여기에서는 "폐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달콤한가.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 단어들로 사전을 만들어 보자.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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