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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7]동물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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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상아(象牙)가 없는 코끼리가 태어나고 있다.’ 뉴스를 보는 순간, 코끼리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코끼리는 전부 상아를 가졌다고 믿어온 제겐, 무척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지구의 나쁜 미래를 예감케 하는 불길한 조짐은 아닐까?’ 경망스런 생각을 하면서 동물원까지 왔습니다.

‘상아 없는 코끼리’에 대한 추론은 두 가지더군요. 첫째는 ‘자연적 도태(淘汰)’라는 견해입니다. ‘상아’가 살육의 목표가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코끼리들의 생존전략이란 것입니다. 그럴법한 얘기입니다. 탐 낼 것도, 빼앗을 것도 없는 상대에게 총구를 겨눌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 멀거니, 코끼리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네 마리인데, 한 가족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상아가 눈에 띄질 않습니다. 이들도 같은 운명일까, 궁금해집니다. 반대의견이 믿고 싶어집니다. “코끼리라고 모두 상아를 가진 것은 아니다. 상아 없는 코끼리의 갑작스런 증가는, 유전적 요인에 의한 단순한 진화다.”

사실이면 좋겠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코끼리 국립공원’의 특수 환경에서 비롯된 일시적 변화란 결론이 나길 기대해봅니다. 별것도 아닌 일을 침소봉대하여 호들갑을 떤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전문가들도 이쪽에 무게를 두는 눈치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왜,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이 떠오를까요?

저는 ‘발이 저립니다’. 지구인의 과오에 대한 자각이며, 반성입니다. 저 또한 공범일 수 있다는 무언(無言)의 자백입니다. 밀렵꾼들만 손가락질할 게 아니지요. 누가, 자신은 코끼리나 상아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손을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감증 환자입니다. ‘발이 저려야 정상’입니다.
코끼리는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피아노 건반, 공예품, 장신구, 당구공, 단추, 도장.... 상아의 쓰임새는 생각보다 훨씬 폭넓고 다양합니다. 제 책상서랍 안에도 있습니다. 인감도장입니다. ‘세계야생동물기금(World Wildlife Fund)’식으로 말하면, 저 역시 ‘범죄 용의자’입니다. 그들의 광고 한편이 떠올라서 하는 말입니다.

비주얼은 ‘아름다운 구두를 신은 여인의 발’. 거기에 이런 헤드라인이 달려있습니다. “그녀는 방금 국제적인 밀수조직에 가담했습니다.”(She’s just stepped into an international smuggling ring.) 사진 속 구두는 인도산 비단뱀가죽 제품. 당연히 온당한 거래의 산물이 아닙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지구와 생명에 관한 모든 사건은 ‘연좌제(緣坐制)’로 다스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고약한 형사제도가, 자연과 환경을 위협하는 범죄에 대한 응징방식으로는 꼭 알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촌’(global village)이란 말이 축제에나 쓰여선 안 됩니다. 마을 안의 모든 문제는 마을 사람 전체의 숙제입니다.

코끼리의 일 역시, 지구의 일입니다. 인도의 종교적 서사시가 노래한 것처럼, 코끼리는 ‘세계의 기둥’. 만물의 ‘상징’이며 ‘대표’입니다. 코끼리는 사람들 가슴을 들락거리고(心象), 천지간에 가득합니다(森羅萬象). 형상, 현상, 인상, 대상, 물상.... 모두 코끼리가 끌고 갑니다. 글자 하나가 온갖 사물과 풍경을 밀고 갑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코끼리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와 인자를, 한 몸에 모두 품고 있습니다. 용도 아니고 범도 아니고 봉황도 아니고 기린도 아닌, 코끼리(象)란 글자가 괜히 그 자리에 앉았겠습니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코끼리 얘기가 나옵니다. 북경에서 처음 코끼리를 보고 찬탄하는 글인데, 그림 같습니다.

“....몸뚱이는 소 같고, 꼬리는 나귀와 같으며, 낙타 무릎에, 범 발톱에, 털은 짧고 잿빛이며 성질은 어질게 보이고, 소리는 처량하고 귀는 구름장같이 드리웠으며, 눈은 초승달 같고, 두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름은 되고, 길이는 한 길이 넘겠으며, 코의 부리는 굼벵이 같으며, 코끝은 누에 등 같은데....”

사진을 찍으며 동물원 관계자에게 물었습니다. “아시아 코끼리는 상아가 없나요?” 암컷의 경우엔 ‘아주 짧거나 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짠한’ 생각이 듭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나 발톱이 없는 독수리의 모습이 포개집니다. 창도 잃고 칼도 잃은 장수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인도와 스리랑카가 떠오르고, 코끼리들이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동남아 여러 나라가 생각납니다. 먼데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커다란 눈망울도 그려집니다. 그들도 더러는 여기 올 것입니다. 코끼리와 눈을 맞추면서 고향 이야기를 할 테지요. 눈빛만으로도 많은 말을 주고받을 것입니다.

코끼리가 먼저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인도 영화 ‘신상(神象)’의 코끼리 ‘라무’처럼 말입니다. 불경에 의하면, 코끼리는 전생(前生)까지 기억한다지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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