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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89]시계탑이 있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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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갑자기 핸드폰이 꺼졌습니다. 아무런 예고도 경고도 없이, 숨을 거뒀습니다. 난감했습니다. '받을 메시지도 많고 연락할 일도 많은데' 어쩌나,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황급히 응급실 문을 두드렸지요. '전문 수리 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증상을 설명하고, 전문가의 진단과 처방을 기다렸습니다.

수리공도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조사를 해봐야 알겠다며 한 시간쯤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요. 의식을 잃고 쓰러진 가족의 보호자처럼 막막한 심정으로,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턱 받치고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길에서 시간을 보내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낯선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잰 걸음으로 걷다보면 시간이 훨씬 더디게 흘러갈 것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방향으로 삼십분쯤 가다가 돌아올 참이었습니다. 부자 동네라서, 높고 큰 집들 구경만으로도 심심치 않았습니다. 방범 카메라의 눈총이 요란했지만, 아직 지지 않은 봄꽃들의 시선은 순하고 착했습니다.

걷다보니 시간이 궁금했습니다. 주머니를 뒤졌지만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핸드폰이 없으니 시간조차 알 길이 없었습니다. 서둘러 큰 길로 나섰습니다. 대로변에선 시계보기가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은 빗나갔습니다. 약국에도, 카페에도, 빵집에도 시계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옛날 같으면, 쇼윈도 바깥에서도 잘 들여다보이는 위치에 둥그런 시계 하나쯤 걸려있던 가게들입니다. 하지만 둥근 것도 네모진 것도 없었습니다. 이내, 당연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시간을 묻는 행인도 없고, 벽시계를 찾아 두리번대는 손님도 없습니다. 타인의 시간보다 개인의 '찰나'가 더 소중한 시대입니다.
'그리니치' 천문대로부터 똑같이 나눠받은 시간의 눈금이 천차만별입니다. 길이도 무게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공공재(公共材) 쯤으로 여겨서 함께 쓰던 공동의 '세월'이 점점 더 사적(私的)이고 내밀한 물건이 되어갑니다. 전화기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 많던 시계들도 숨어버렸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계탑입니다. 한 시절, 그것은 어디에나 있었지요. 광장에 있었고, 정거장에 있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 있었고, 종합병원 입구에 있었습니다. 군부대 연병장에 있었고, 체육관이나 운동장 근처에 있었습니다. 공업단지의 중심과 공원 한복판을 지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계탑을 보면서 뛰거나 달렸습니다. 일터와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시간의 소중함이 천금 같아서 탑은 실제보다 훨씬 높아보였습니다. 이 땅 모든 시계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때였지요. 마루에 걸린 벽시계 소리가 옆방까지 들리고 괘종시계 종소리가 담을 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시계보다는, 여럿을 위한 시계가 더 많았습니다. 당연히 소리가 커야 했고, 동작이 커야 했습니다. 덕분에 귀가 어두운 할머니도 알아듣고, 숫자를 모르는 농부도 때를 알았습니다. 그런 시계가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첫차의 기적소리, 라디오 프로그램 시그널, 산등성이에 걸린 해와 달....

마흔이 되어서야, 자신의 '태어난 시각(生時)'을 알아냈다는 소설가 K씨가 생각납니다. 단서는 어머니의 기억. "너를 낳을 때, 아침볕이 막 안방 문턱에 닿고 있었단다." 말씀대로 폐가가 된 고향집에 가서, 그 순간의 시각을 확인했다지요. '10시 6분 45초'. 어머니의 시계는 아들 시계만큼 정확했습니다.

그나저나, 제 핸드폰은 아주 못쓸 상태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결국 새것을 장만했습니다. 전화기 하나 잃으니, (인정하기 싫지만) 손발을 잃은 것처럼 불편하더군요. 머릿속 정보들도 죄다 그리로 옮겨가서, 전화번호 하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시간도 알 수 없어서 쩔쩔맨 걸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은 아침 일찍, 정거장에 나왔습니다. 행사가 있어서 지방에 가는 길입니다. 문득, 예전에 시계탑이 있던 자리가 궁금해집니다. 역 광장이 사라지는 바람에 정확한 위치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정거장 손님들을 상대로 장사하던 수백 개의 상점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많던 집들이 고층빌딩 몇 채 안으로 다 들어갔습니다. 숨어버렸습니다. 광장 과 시계탑의 실종이, 대다수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던 시대의 종언(終焉)처럼 느껴집니다. 지난겨울에 타계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黃秉冀)' 선생의 작품 '시계탑'의 선율이 떠오릅니다. 대학병원의 시계탑을 보고 지었다는 곡입니다.

얼마나 많은 환자와 가족들이 그 시간의 탑을 바라보았을까요. 희망과 절망이 거기서 나뉘고, '생로병사(生老病死)'가 그 탑을 돌아서 주어진 길로 갔을 것입니다. 시계탑은 그 모두에게 균등한 위로와 격려와 박수와 갈채를 보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리워하는 시계탑도 마찬가지였을 테지요.

시계탑의 시간은 적어도, 지금 제 주머니 속의 시간처럼 고독하고 이기적이진 않았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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