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가 크지만 터무니없이 길쭉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나는 내 얼굴 모습을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처럼 보였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그런 얼굴을 가지려면 삶의 방식도 달라야했다). 나는 나의 얼굴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때마다 내 얼굴을 '위장'했다…."
몸은 서재에 있지만, 생각은 아득히 멀고 깊은 곳에 가 있는 표정이지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 한가운데 서 있는, 그 앙상한 나무의 인상입니다. 언제 올지는 몰라도, 오기는 올 거라는 '고도(Godot)'씨도 비슷한 이목구비일 것 같습니다. 권태롭고 부조리한 세상을, 깨어서 견디는 자의 고독과 허무가 가득한 얼굴입니다.
저 역시, 글 쓰는 자로서의 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시인의 사진 앞에선 모종의 열등감까지 느낍니다. "나는 왜 이 사람처럼 생기지 못했을까?" '김수영(金洙暎)'과 '백석(白石)'이 대표적인 비교 대상입니다. 전형적인 시인의 마스크, 혹은 잘 생긴 배우의 '얼굴'이지요.
여기서 길 하나만 건너면 그가 그토록 연모한 처녀 '란(蘭)'이 살던 마을입니다. 한자로 해(日)와 달(月)을 닮은 우물(井)이 있다고, 동네 이름이 '명정(明井)'입니다. 우물 앞에 서 있으려니, 란과 백석이 어른거립니다. 백석의 연적(戀敵)도 보입니다. 그대로 '노천 소극장'이 되어도 좋을 우물가에, 러브스토리가 꿈틀댑니다.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중략)…//난(蘭)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하략)"
북녘에서 온 훤칠한 청년시인이, 두 뺨에 동백꽃빛이 도는 처녀를 기다리던 곳.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요. 자못 신기한 것은 이 시에 등장하는 '금(錦)이'라는 이름입니다. 박 선생 아명(兒名)도 '금이'였던 까닭입니다. 십여 년의 나이차를 무시하고 두 '금이'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싶어집니다.
속살이 비치는 '은조사 적삼'을 입고, 뻐꾸기 우는 서문안 고개를 넘나들던 이야기가 선생의 시('서문안 고개')에도 나오는 까닭입니다. 백석의 연인 '란'의 사진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박 선생에게서 그녀의 풍모를 읽습니다. 선생의 모친 역시 '적삼 하나만 갈아입어도 서문안고개가 환해진다'고 칭송을 받던 분이었다지요.
'동피랑' 마을과 짝을 지은 '서피랑' 마을회관 벽에는 박 선생 집안 여동생 할머니가 쓴 시도 있습니다. 삐뚤빼뚤 초등학생 같은 글씨입니다. "금이 언니야 언니 니는 백 살까지 살 줄 알았다'로 시작해서 '보고 싶다'로 끝납니다. '금이 언니는 백 살까지 살아도 아름다울 사람', 그래서 '두고두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읽힙니다.
통영에는 버스 정류장마다 사람의 얼굴이 있습니다. 이 고장이 낳은 예술가들입니다. 생김새 그대로 시 같고, 소설 같고, 그림 같고, 음악 같은 얼굴들입니다. 프랑스 문학의 거장 '발자크'의 말이 떠오르는 얼굴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이 고장 사람이야 그렇다 해도, 타관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백석과 이중섭. 두 사람 모두 저 먼 북녘 사람. 그러나 얼굴이 '풍경'인 사람. 얼굴이 '책' 한 권인 사람. 버스 정류장에 붙은 어느 음악가의 얼굴을 보다가 불쑥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한 인간이 풍경이나 장소가 되는구나. 어떤 이는 먼 곳에서 와서 낯선 고장의 이정표가 되는구나. 이 항구도시에선 얼굴이 마을 이름이 되는구나. 사람이 정거장이 되는구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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