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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53] 통영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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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소설가, 사진가 그리고 화가… 그야말로 전방위(全方位) 예술가의 삶을 살다가, 올 연초에 세상을 뜬 사람. '존 버거(John Berger)'에게는 콤플렉스가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책 '말하기의 다른 방법'에 다음과 같은 고백의 문장이 보입니다.

 "…코가 크지만 터무니없이 길쭉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나는 내 얼굴 모습을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처럼 보였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그런 얼굴을 가지려면 삶의 방식도 달라야했다). 나는 나의 얼굴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때마다 내 얼굴을 '위장'했다…."
 사무엘 베케트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작가'입니다. 세상에 '얼굴 사전(辭典)'이 있다면 그의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풀이가 붙을 것입니다. "작가란 이렇게 생긴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문학을 의인화하면, 이런 형상이 된다." 특히,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그의 초상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몸은 서재에 있지만, 생각은 아득히 멀고 깊은 곳에 가 있는 표정이지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 한가운데 서 있는, 그 앙상한 나무의 인상입니다. 언제 올지는 몰라도, 오기는 올 거라는 '고도(Godot)'씨도 비슷한 이목구비일 것 같습니다. 권태롭고 부조리한 세상을, 깨어서 견디는 자의 고독과 허무가 가득한 얼굴입니다.

 저 역시, 글 쓰는 자로서의 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시인의 사진 앞에선 모종의 열등감까지 느낍니다. "나는 왜 이 사람처럼 생기지 못했을까?" '김수영(金洙暎)'과 '백석(白石)'이 대표적인 비교 대상입니다. 전형적인 시인의 마스크, 혹은 잘 생긴 배우의 '얼굴'이지요.
 지금 저는 백석 시인의 시비 앞에 와 있습니다. 그의 시 '통영 2'를 새겨놓은 빗돌입니다. 통영은, 조선팔도에 발길 닿지 않은 데 없었을 이 보헤미안 시인이 특히나 사랑한 곳.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고 노래할 만큼, 엄청난 애정을 고백한 곳. 더구나 이곳, 충렬사 언저리는 그가 수없이 오갔을 길이지요.

 여기서 길 하나만 건너면 그가 그토록 연모한 처녀 '란(蘭)'이 살던 마을입니다. 한자로 해(日)와 달(月)을 닮은 우물(井)이 있다고, 동네 이름이 '명정(明井)'입니다. 우물 앞에 서 있으려니, 란과 백석이 어른거립니다. 백석의 연적(戀敵)도 보입니다. 그대로 '노천 소극장'이 되어도 좋을 우물가에, 러브스토리가 꿈틀댑니다.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중략)…//난(蘭)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하략)"

 북녘에서 온 훤칠한 청년시인이, 두 뺨에 동백꽃빛이 도는 처녀를 기다리던 곳.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요. 자못 신기한 것은 이 시에 등장하는 '금(錦)이'라는 이름입니다. 박 선생 아명(兒名)도 '금이'였던 까닭입니다. 십여 년의 나이차를 무시하고 두 '금이'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싶어집니다.

 속살이 비치는 '은조사 적삼'을 입고, 뻐꾸기 우는 서문안 고개를 넘나들던 이야기가 선생의 시('서문안 고개')에도 나오는 까닭입니다. 백석의 연인 '란'의 사진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박 선생에게서 그녀의 풍모를 읽습니다. 선생의 모친 역시 '적삼 하나만 갈아입어도 서문안고개가 환해진다'고 칭송을 받던 분이었다지요.

 '동피랑' 마을과 짝을 지은 '서피랑' 마을회관 벽에는 박 선생 집안 여동생 할머니가 쓴 시도 있습니다. 삐뚤빼뚤 초등학생 같은 글씨입니다. "금이 언니야 언니 니는 백 살까지 살 줄 알았다'로 시작해서 '보고 싶다'로 끝납니다. '금이 언니는 백 살까지 살아도 아름다울 사람', 그래서 '두고두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읽힙니다.

 통영에는 버스 정류장마다 사람의 얼굴이 있습니다. 이 고장이 낳은 예술가들입니다. 생김새 그대로 시 같고, 소설 같고, 그림 같고, 음악 같은 얼굴들입니다. 프랑스 문학의 거장 '발자크'의 말이 떠오르는 얼굴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이 고장 사람이야 그렇다 해도, 타관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백석과 이중섭. 두 사람 모두 저 먼 북녘 사람. 그러나 얼굴이 '풍경'인 사람. 얼굴이 '책' 한 권인 사람. 버스 정류장에 붙은 어느 음악가의 얼굴을 보다가 불쑥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한 인간이 풍경이나 장소가 되는구나. 어떤 이는 먼 곳에서 와서 낯선 고장의 이정표가 되는구나. 이 항구도시에선 얼굴이 마을 이름이 되는구나. 사람이 정거장이 되는구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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