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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46]장충체육관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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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사생(寫生)대회'에 나가서 제법 큰 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무얼 그렸는지, 무슨 상을 탔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분명한 기억은 무척 성대한 미술잔치였다는 것입니다. 시상식을 장충체육관에서 했으니까요. 유명 언론사가 펴내는 '소년 신문' 이름이 붙은 행사답게 크고 화려했습니다.

시상식 전 날, 제 짝이 부러워하는 얼굴로 물었습니다. "너 장충체육관 간다며? 그럼, 링 위에서 상을 타는 거야? '김일(金一)'이 챔피언 벨트를 매는 자리에서?" 그랬습니다. 그곳은 우리들의 영웅 김일 선수가 통쾌한 박치기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두 손을 높이 쳐들며 포효하던 곳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곳 한가운데는 권투나 레슬링 경기를 위한 링이 붙박이로 놓여있는 줄 알았지요. 친구에게 약속했습니다. "링의 탄력이 어떤지 잘 보고 올께. '로프(rope) 반동'도 직접 한번 시험해보고." 레슬러들의 육중한 몸이 어쩌면 그렇게, 고무공처럼 튀어 오르는지 알아오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링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박치기 왕'이 밟은 자리를 디뎌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 가서 펼쳐놓을 자랑거리가 시시해졌다는 생각에 맥이 풀렸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어린이들을 위해, 갖가지 흥미진진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지만 제 머리 속은 온통 그것뿐이었습니다.

"링은 어디로 갔을까. 왜 그걸 치우고 행사를 하는 걸까? 상 받는 어린이를 한 사람씩 링 위로 불러올려서 상을 주면 더 멋지지 않을까?" 참으로 어린 생각이었지요. 체육관 바닥은 경기 종목에 따라 변신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체육관은 권투나 레슬링 말고도 할 일이 무척 많음을 몰랐습니다.
그림=최길수 화백

그림=최길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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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장충체육관만한 규모와 시설을 갖춘 공간은 전국에 두어 군데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쉴 틈이 없었을 테지요. 대통령 컵이나 대통령 깃발이 걸린 운동경기도, 대학가요제도 여기서 열렸습니다. 김기수, 신동파, 장윤창… 한국 체육의 별들이 여기서 빛났습니다.

원래는 육군체육관이었던 이 경기장에서, 군인 출신 대통령은 명령이 규칙인 '군대식' 게임을 했습니다. 1972년, 이른바 '체육관 선거'.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회치곤 너무도 싱거웠지요. 혼자 뛰고 혼자 우승한 격이었습니다. 1979년,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으로 뽑힌 곳도 여기였지요. 그것도 감동적인 경기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현대사 속의 체육관엔 환호와 박수만큼 통곡과 눈물도 많았습니다. 어느 해 오월, 남도(南道) 어느 무예 도장(道場) 바닥에는 죽은 사람이 줄지어 눕혀지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숨졌는지도 알 수 없는 목숨들이, 짐짝처럼 눕혀졌습니다. 들것에 실려 오고, 관에 담겨서 왔습니다.

대한민국이 커지면서, 체육관도 하나 둘 늘어갔습니다. 군청 소재지에도 세워지고, 읍내 중학교에도 생겼습니다. 거기서 새마을운동 기념식도 하고, 반공궐기대회도 했습니다. 강연회도 열리고, 인기가수들 리사이틀도 열렸습니다. 종교행사장으로도, 국회의원선거 개표장소로도 썼습니다.

한가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큰물이 나거나, 태풍이 지나가면 체육관은 더욱 바빠졌습니다. 이부자리나 겨우 챙겨들고 나온 이재민들로 가득했지요. 해일이 덮쳐도, 산불이 쓸고 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염병이 돌아도, 지진이 일어도 체육관은 집이 됐습니다. 뉴스카메라가 뛰어오고, 담요와 컵라면이 달려와 모였습니다.

어떤 체육관 이름은 스포츠 기사가 아니라 사회면 소식을 통해 더 유명해졌습니다. 삼년 전 어느 봄날, 제 일터가 있는 도시의 '올림픽 기념체육관'이 그랬습니다. 농구골대가 있던 자리에, 수만 송이 국화꽃으로 장식된 제단이 차려졌습니다. 거기에,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 얼굴이 걸렸습니다.

농구대잔치 관중보다, 노래자랑 방청객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체육관 앞에 줄을 섰습니다. 사진뿐인 죽음들 앞에 줄을 섰습니다. 버스에도 줄을 섰지요. 남쪽바다 섬마을 체육관으로 떠나는 버스였습니다. 220일간 체육관을 집으로 썼던 사람들과 그들의 '응원단'을 태우고 천릿길을 오가던 버스였습니다.

'팽목항' 아니, 아이들이 떠난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차였습니다. 장충체육관 앞에서 왜, 그 슬픈 버스가 떠오를까요. 왜, 제 어린 날의 '슈퍼맨'들이 생각날까요. 김일 선수가 박치기 한방씩 먹여주면 좋을 얼굴들이 어른거립니다. 이왕표 선수가 보기 좋게 메다꽂아주면 시원하겠다 싶은 사람들도 보입니다.

다시 열린 장충체육관은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고, 전국 대부분의 체육관들이 다목적 공간임을 강조합니다. 진도실내체육관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무얼 해도 좋으니, 더 이상 '슬픔의 여관'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동과 환희의 눈물은 많이 보고 싶지만, 분하고 억울한 눈물은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이곳에선, 격투기 경기가 열린다지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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