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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맥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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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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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힘 쿠츠만(Achim Kuczmann)이 은퇴했다. 그는 좋은 친구였고 선생이었으며 훌륭한 (나의) 코치였다. 나는 2002년 월드컵 취재를 마친 다음 회사의 보살핌을 받아 독일로 공부하러 갔다. 오전에는 쾰른에 있는 학교에 나가고 오후에는 레버쿠젠에 있는 바이엘의 스포츠 클럽에 나가 운동을 했다. 나는 자이언츠라는 농구단에서 일(?)을 했다. 아힘은 농구에 미친 나를 훈련에 참가시키고 벤치를 내주었으며 일을 맡겼다. 나는 그에게서 거의 모든 것을 배웠다.

나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분데스리가를 누비는 그를, 독일의 대표 팀을 이끄는 그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독일 대표 팀이 2006년 8월 일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을 때 그가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때 막 회사의 연구팀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갈 수 없었다. 2013년에는 내가 강의하러 나가던 대학의 학생들을 위해 그를 서울로 초대했다. 그는 소속 팀을 이끌고 자메이카로 전지훈련을 가야 해서 오지 못했다.
그는 2017-18시즌을 마친 다음 후배인 한지에게 휘슬을 물려주고 클럽 행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예산 클럽인 자이언츠농구단을 잘 지켜냈듯이 구단 일도 잘해낼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근면하고 거짓이 없으며 매사에 정확하니까. 그를 꼭, 그리고 곧 만날 생각이다. 내가 회사 일을 잠시 쉬며 논문을 쓰던 2012년 7월19일 아힘은 베를린에 자료를 구하러 갔다가 밤늦게 돌아온 나를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 내가 묵는 숙소 현관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도 그를 기다리겠다.
그날 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농구와 가족, 친구들 얘기를 했다. 나는 '쾰시(Koelsch)'를, 그는 네덜란드 맥주를 마셨다. 쾰시는 쾰른의 맥주다. 나는 쾰른이나 레버쿠젠에 가면 반드시 쾰시를 마신다. 아침 일찍 하숙집을 나와 학교로 가는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맥주 공장이 있었다. 가을날 새벽 산처럼 쌓인 맥주 재료에서 김이 솟아 안개를 이룬 풍경, 진한 호프 냄새를 기억한다. 우리는 자주 미각을 도구 삼아 기억을 되살린다. 사람의 입은 말을 하기 이전에 미각으로 먼저 느끼며, 조금 과장하면 '생각한다'. 고향과 추억을 소환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흔히 음식이 등장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내 기억 속의 독일은 하숙집 아주머니가 매일 새벽 내려 주던 진한 커피와 쾰시의 미각으로 남아 있다.

쾰시가 특별히 맛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맥주보다 못하지는 않다. 2006년 6~7월 독일월드컵이 열렸을 때 취재하러 가서 사 읽은 잡지에 '맥주월드컵'이라는 특집이 실렸다. 우리 맥주는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시음한 평론가는 '화학공장에서 터진 끔찍한 사고의 부산물 같다'고 혹평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남조선 맥주는 정말 맛이 없다. 맥주는 확실히 우리 것이 더 맛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정상회담으로 남북한 교류의 가능성이 커지자 "1순위로 대동강 맥주를 수입해 달라"는 요구가 있다고 한다. 누리꾼들은 "대동강 맥주 4캔 만원 기다리고 있소, 동무" 같은 재담을 올렸다.

그중에 "대동강 맥주에 한라산 소주 말아서 통일주 마시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는 게시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편 우습고 한편 가슴 뭉클하다. 아, 그거 참 맛있겠다. 나도 제주에 가면 그곳에 사는 선후배님들을 만나 반드시 한라산 소주를 마신다. 하지만 대동강 맥주와 한라산 소주라는 '남북합주(合酒)'의 미각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역시 젊은이들의 상상력은 발랄하고 힘차다.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상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가슴 뜨거운 봄이다.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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