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는 내가 하숙하는 동안 매일 새벽 나보다 먼저 일어나 새 커피를 내렸다. 단단한 빵을 자르고 치즈와 살라미를 올려 한 접시 차린 뒤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분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나는 몇 주째 빵에 손도 대지 않고 커피만 한 잔 마시고 학교에 갔다. 아주머니는 내가 일찍 집에 들어가는 날 맛있는 걸 해준다고 이것저것 요리도 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많이 먹지 못했다. 별미라면서 사다 준 염소젖 치즈를 입에 넣었을 때는 괴로웠다.
아주 최근에 와서, 나는 조금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이해는 아마도 그 시간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리움에 힘입었을 것이다. 시간은 힘이 세고, 인간의 기억은 거기 집요함을 더한다. 기억은 공감각(共感覺)이 축적한 기록의 총체로서 시간의 저장고 속에서 천천히 숙성하여 우리 의식의 외피를 향해 떠오른다. 숙성의 방식에 따라 추억이 되거나 악몽으로 남는다.
기억이든 추억이든 악몽이든 우리 공감각이 유통한 채널을 재활용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장소, 어느 시간을 다시 떠올릴 때는 우리가 보았거나 맛보았다고 생각하는 그 기억, 줄기차게 귓가를 울리는 빗소리와 염소젖 치즈 냄새 같은 것들이 현실인양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의 스크린에 조사(照射)하는 재생화면은 우리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에 더 가까울 수는 있다.
2018년 4월 27일. 10년이나 20년이 지난 다음 당신이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지 나는 알 수 없다. 당신의 의지보다는 현실이 기억을 지배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그날 밤 쾰른으로 가는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건너리라. 막 지나친 신의주의 불빛이 아름다울 것이다. 전혜린.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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