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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쾰른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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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에 며칠째 비가 내렸다. 독일에 간 지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향수병에 찌들어 못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입맛이 떨어져 시내에 있는 아시안 마켓에서 사온 일본이나 중국 라면으로 끼니를 메웠다. 혈압이 떨어지면서 무력해져 커피를 하루 열 잔씩이나 마셔댔다. 수염도 깎지 않고 학교와 클럽을 겨우 오갔다. 클럽에서 운동을 할 때는 기운이 없어서 쩔쩔맸다. 그러자 하숙집 아주머니가 걱정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하숙하는 동안 매일 새벽 나보다 먼저 일어나 새 커피를 내렸다. 단단한 빵을 자르고 치즈와 살라미를 올려 한 접시 차린 뒤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분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나는 몇 주째 빵에 손도 대지 않고 커피만 한 잔 마시고 학교에 갔다. 아주머니는 내가 일찍 집에 들어가는 날 맛있는 걸 해준다고 이것저것 요리도 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많이 먹지 못했다. 별미라면서 사다 준 염소젖 치즈를 입에 넣었을 때는 괴로웠다.
주일이 되었을 때, 성당에 다녀온 나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무심코 혼잣말을 했다. "쾰른은 날씨가 왜 이래?"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아주머니가 벌컥 화를 냈다. "쾰른 날씨가 어때서!" 목소리가 칼칼했다.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못하고 '어버버…'하다가 내 방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아주머니가 방에 찾아와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주머니가 화를 낸 이유를 몰랐을 뿐이다.

아주 최근에 와서, 나는 조금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이해는 아마도 그 시간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리움에 힘입었을 것이다. 시간은 힘이 세고, 인간의 기억은 거기 집요함을 더한다. 기억은 공감각(共感覺)이 축적한 기록의 총체로서 시간의 저장고 속에서 천천히 숙성하여 우리 의식의 외피를 향해 떠오른다. 숙성의 방식에 따라 추억이 되거나 악몽으로 남는다.

기억이든 추억이든 악몽이든 우리 공감각이 유통한 채널을 재활용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장소, 어느 시간을 다시 떠올릴 때는 우리가 보았거나 맛보았다고 생각하는 그 기억, 줄기차게 귓가를 울리는 빗소리와 염소젖 치즈 냄새 같은 것들이 현실인양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의 스크린에 조사(照射)하는 재생화면은 우리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에 더 가까울 수는 있다.
한 감각이 다른 감각을 온전히 지배하기도 어렵다. 그 중 하나가 우세할 수 있지만 대개는 착각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이 아니라 제3의 감각이 결정하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손등이 스탬프에 눌릴 때와 같은 물컹한 압박과 딸각거리는 진동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다. 그럴 때 몰랐던 것을 알게 되기도, 희미했던 것이 또렷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놓지 않는다. 우리는 오감을 열어 오늘을 지키고 미래를 상상한다.

2018년 4월 27일. 10년이나 20년이 지난 다음 당신이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지 나는 알 수 없다. 당신의 의지보다는 현실이 기억을 지배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그날 밤 쾰른으로 가는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건너리라. 막 지나친 신의주의 불빛이 아름다울 것이다. 전혜린.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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