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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빳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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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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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좋은데. 내일 네가 골을 넣을 것 같아."
"내가 골을 넣으면 코치님에게 달려가 이마에 키스를 할게요."

골은 황선홍이 넣었다. 코치는 박항서다. 2002년 6월4일 부산에서 열린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조별 리그 첫 경기. 황선홍이 선제골을, 유상철이 추가골을 넣어 폴란드에 2-0으로 이겼다. 황선홍은 약속을 지켰다. '예언자'를 향해 달려갔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줄 알고 맞으러 나간 거스 히딩크는 조금 뻘쭘했다. 하지만 황선홍의 등을 찰싹 때려 기쁨을 표현했다. 그해 여름의 신드롬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항서는 지금 베트남에서 2002년의 히딩크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가 지휘하는 베트남의 23세 이하 대표팀이 2018 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 결승에 갔다. 베트남 축구사에 길이 남을 승리라고 한다. 그까짓 23세 이하 대회 성적을 갖고 웬 호들갑이냐고?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박종환이 이끄는 한국 19세 이하 대표팀이 4강에 가자 우리는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박항서는 대머리다. 한양대학교 다닐 때부터 이마가 훤했다. 반짝거리는 정수리가 라디오에 들어가는 배터리 꼭지를 닮았다고 해서 별명이 '빳데리'다. 그는 프로 팀 럭키금성(지금은 FC서울)에서 뛰었고, 코치로도 일했다. 2002년 월드컵은 그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 후 아시안게임 대표 팀 감독을 맡아 동메달을 땄지만 기대한 결과는 아니었다. 사령탑에서 물러나 독일에서 잠시 연수한 뒤 몇몇 축구 팀 벤치를 전전했다.

그가 연수할 때 나도 독일에 있었다. 한번은 레버쿠젠에 사는 윤성규 전 수원 삼성 축구단 단장, 재독축구인 한일동 선생과 쾰른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네 사람이 한일동 선생이 운영하는 민박집 식당에서 만났다. 내 안부를 묻던 그는 "공부를 하러 왔다"는 내 말을 듣고 "기자님이 공부를 더해 뭐하시게요?"라며 껄껄 웃었다. "우리가 기자님에게서 배우는걸요"라며 덕담도 했다. 그는 그때 만신창이가 된 심정으로 독일에 갔다.
2002년 9월 7일 서울에서 '통일축구경기'가 열렸다. 남북 대표팀이 경기하는데 네덜란드에서 잠시 들어온 히딩크가 우리 대표팀의 감독 자리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았다. 이 일로 비판 여론이 일었다. 박항서는 "히딩크 감독님을 변함없이 존경한다"고 에둘러 말했다. 독일 동포 축구인들은 히딩크와 우리 축구협회를 비난하며 박항서를 위로했다. 박항서는 말을 삼가며 축구협회와 히딩크를 감쌌다. 그때 박항서에게서 인내와 관용을 보았다.

우리는 "좋은 일이 있을 때 연락하자"며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 뒤 박항서를 만나지 못했다. 독일에서 헤어진 뒤로도 박항서는 여러 불편한 일을 겪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필시 '충전'을 위한 시간이었으리라. 지금 빳데리는 완전히 충전되었고, 마침내 빛을 내고 있다. 박항서는 베트남에서 영광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더 큰 성취가 기다리는지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 그에게 달려가 이마에 키스하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이야기는 '번외편'이다. 머리를 소재로 쓴 글이지만 박항서는 원래 계획에 없었다.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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