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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고복격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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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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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에 사람들이 밥을 먹는 장면이 더러 나온다. '주막'이나 '점심' 같은 그림이다. 놀라운 부분이 있다. 밥그릇이 엄청나게 크다. '밥통'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정도다. '점심'에 나오는 한 사나이는 자기 머리만한 밥그릇을 왼손에 들고 젓가락을 든 오른손으로 반찬을 집고 있다. 김홍도의 그림에 나오는 밥그릇의 크기는 조선시대 말기 서양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실로 엄청나게 드셨나보다. 서양인들은 그 식사량에 놀랐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보다 두 배를 먹는다."(선교사 그리피스 존)
 "보통 3, 4인분을 먹어 치운다. 서너 명이 앉으면 복숭아와 참외가 스무 개 이상 사라진다."(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프랑스인 신부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꽤 자세히 기록을 남겼다. 그는 '조선순교자비망록'에 기록하기를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 양을 중시한다. 식사하는 동안 말을 하지 않아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노동자의 식사량은 쌀밥 1ℓ인데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천주교인 장정 한 사람은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는데,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5세가 다 된 어떤 사람은 식욕이 없다면서도 다섯 사발을 비웠다"라고 했다.

 대식(大食)은 여러 문화권에서 허물이 아니다. 오히려 많이 먹음으로써 남다름을 드러내기도 했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촉한의 장수 황충은 제갈공명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의 출정을 꺼리자 일갈한다. "염파는 나이 여든이 넘었어도 한 말 밥에 고기 열 근을 먹었습니다. 이런 그의 먹성을 보고 여러 제후들은 두려워하여 조나라를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황충은 아직 일흔이 되지 못했습니다." 염파(廉頗)는 전국시대 조(趙)의 명장이다. 노년에도 젊은 장수 못지않은 완력과 무공을 발휘해 황충과 함께 노익장의 상징으로 꼽힌다.

 우리 어른들은 흔히 "밥을 든든히 먹어라. 사람은 밥심으로 버티느니라. 사나이가 큰일을 하려면 뱃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잘 먹어야 한다"고 했다. 무릇 일을 시작하려면 배부터 채워야 했다. 배는 에너지 저장소인 동시에 공급지이기도 했다. 또한 본능의 중심으로서 이곳을 채워야 비로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고복격양(鼓腹擊壤)의 고사가 생겼다. 중국의 요임금 때, 한 노인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침으로써 요임금의 덕을 찬양하고 태평성대를 즐겼다는 일에서 나온 말이다.(국립국어원)
 지난겨울 촛불이 서울 광화문 광장을 밝힐 때 일부 지식인들이 우려했다.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며 그런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고 했다. 대통령이 누구인지 몰라도 충분히 배부르고 행복하다며 21세기판 고복격양가를 부를 수는 없겠느냐는 것이다. 글쎄. 고복격양의 시대는 참으로 행복한 시대일까. 21세기에도 고복격양은 참행복인가. 배가 부를 대로 부른 바둑이가 복날 말뚝에 묶여 널브러진 채 제 발등을 핥을 때, 저놈은 행복한가.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라는 공복감과 포만감 사이 어디엔가 행복으로 가는 길이 놓이지는 않았는가.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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