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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반쪽의 미치광이 혹은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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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피터 마쓰는 미국 워싱턴포스트 특파원으로 1992~1993년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했다. 이 때 체험을 바탕으로 1996년 ‘네 이웃을 사랑하라(Love Thy Neighbor : A Story of War)'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흔히 쓰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라는 표현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음침한 지하실에 늘어붙은 콜타르처럼, 눅진한 악마성으로 점철된 이 전쟁 속 ‘야수’의 얘기들을 알게 되면 오히려 점잖은 표현으로 보일 정도다.
이 책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회의를 던져준다. 문명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행위들이, 나와 같은 형태의 ‘인간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피터 마쓰의 전언은 몸서리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 과정에서 살인과 강간, 수용소에서의 고문 등이 빚어지곤 하는데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특히 잔혹하고 역겨운 수법들이 이용됐다. 그럼에도 피터 마쓰는 “도덕적 광기의 문제는 세르비아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다. 인간이 또 다시 잘못을 저질렀을 뿐”이라고 했다.

문명 사회에서 괴리된 오지의 식인종들이 벌인 야만의 살육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유고 연방의 해체와 분열 과정에서 일어난 내전이었던 것처럼, 한반도 역시 내전을 겪었고 유사한 경험을 안고 있다. 황석영씨가 실화를 토대로 쓴 소설 ‘손님’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이들이 순식간에 갈라지고 야수로 변해 서로를 잔인하게 죽여나간다. 애·어른 구분 없이 방공호에 며칠씩 가둬놨다가 결국 불에 태워 죽이는 집단 살육도 서슴지 않는다.
특정한 상황에 처하면 인간 안에 숨어있던 악마성이 발현되는 법이다. 이성과 문명은 초고속 타임머신을 타고 짐승보다 못한 야만으로 급전직하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 이르도록 하지 않는 것이 인류의 과제다.

북한과의 갈등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다.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 평화가 낫다’는 명제가 더욱 절실하다. 어디서든 지옥은 연출될 수 있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안에서는 사춘기 소녀들의 엽기적 폭력성이 둔기처럼 사회를 강타했다. 국가 간 갈등과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악마성이 비집고 나오는 것처럼, 어른들이 만든 비열한 정글의 토양에서 올라온 나쁜 싹들은 아닐까. 곱씹어볼 일이다.

피터 마쓰는 자신의 책 맨 앞에 영국의 작가 레베카 웨스트의 말을 인용해 놨다. "우리의 반쪽만이 제정신이다. 우리의 반쪽만이 기쁨과 오랜 행복을 누리고자 하며…우리의 다른 반쪽은 거의 미치광이이다. 상쾌한 것보다는 음침한 것을 선호하고 고통과 그 암담한 절망을 오히려 좋아한다. 또 우리의 삶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우리 집을 검게 탄 재만 남게 만드는 대재앙 속에서 죽기를 원한다."

반쪽의 미치광이 혹은 악마성을 제어하지 못하면 희망은 없다. 우리는 먼지처럼 가볍고, 쉬이 사라질 수 있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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