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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그냥 쉬고 떠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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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과 여행이 필요한 계절이다. 그러나 내가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면 쉴 수 없고 여행을 떠나지 못할 이유들이 산적했다. 그런 이유들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쉬고 떠날 수 없는 이유들이 떠날 이유보다 훨씬 많다. 시간의 부족, 경제적 사정, 가족과 주위의 시선, 밀린 일거리, 마음의 여유 없음! 이런 것들은 쉼과 여행을 가로막는 '합리적 의심'일 수 있다. '합리적 의심'이란 특정화된 예감이나 불특정한 의심이 아닌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실에 기반을 둔 의심을 말한다. 이것은 미국 형사소송법상 기준이며 몸수색이나 교통경찰의 자동차를 멈추어 조사하는 것은 영장 없이도 합리적 의심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 시스템 안에서 살면서 계산적 생각에 길들여지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 매사에 합리적 이유와 원인 그리고 근거를 따진다. 이런 태도는 무한경쟁의 원리가 작동하는 우리의 숨 가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때로는 이유를 따지는 그런 합리적ㆍ계산적 사유와 과감히 결별하고, 그냥 마음을 비우고 익숙한 장소와 일로부터 낯선 곳을 향해 떠날 단순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수지(收支)를 계산하면서 매사를 합리적으로 경영해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사고의 패턴이 과도하거나 지나치면 불행하게도 인간의 내밀한 사적인 영역, 즉 우정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가치마저도 합리적 계산의 대상으로 변질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창조적이고 신바람 나는 삶을 모험하기 위해서는 과도한 합리적 의심을 내려놓을 모종의 용기가 필요하다. 일단 이것저것 이유를 따지는 합리적 의심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말하자면 눈 한번 질끈 감고 내리는 결단과 용기를 통해 계산적 사유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천진무구한 눈으로 이해관계 없이 사물을 바라보듯이, 때로는 당면한 현실과 다가올 미래를 초연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생을 유한한 무상성의 관점에서 또는 현실을 영원의 관점에서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가끔은 합리적ㆍ계산적 사유와는 대조적으로 인생 전체를 관조해 보는 거시적ㆍ초월적 관점 내지 무거워진 머리를 완전히 비우는 명상이 필요하다.

"왜 무언가 없지 않고 있는가?"에 관해서 유한한 인간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영원한 비밀로 남는다. 연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없다. 연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꽃은 왜 피는가? 이유가 없다. 그저 피기 때문에 핀다. 지금 휴식하고 여행을 떠날 확실한 이유가 있는가? 그런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쉬면서 떠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대안이다. 우리는 때로는 그 알량한 계산적 사유의 올무로부터 해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어도 무조건 내려놓고 떠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모름지기 과도한 합리적 의심에서 벗어나야 마음이 비로소 쉼을 얻을 수 있다. 그 쉼과 떠남 속에서 일상의 세계에서 맛볼 수 없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낯선 시간과 새로운 삶의 물결 속에서 예기치 못한 기쁨과 잠자는 야성적인 생명력을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쉬고 떠날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리듬을 경험하고 숨어있는 나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이유와 조건 없이도 감행하는 용기 있는 휴식과 여행은 화석화된 일상을 다시 살아있게 만드는 위대한 쉼표이며, 동시에 비루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가치 있는 모험이다.
강학순 안양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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