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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59] 이발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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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머리카락 씨앗만 뿌려진 사람이야." 정채봉의 동화 '오세암'에서 다섯 살 꼬마 길손이가 하는 말입니다. 앞 못 보는 누나 감이에게 '스님'을 설명해주는 대목이지요. 스님 머리모양을 그림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옷 빛깔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맛없는 국 색깔이야." 기막힌 묘사력입니다.

길손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제 머리는 잡초 무성한 들판입니다. 대체 무슨 씨앗이 이리도 잘 자라나는 걸까요. 엊그제 깎은 것 같은데, 벌써 수북합니다. 이맘때의, 묵은 묘처럼 어지럽습니다. 번뇌 망상의 '풀', 절집에서는 '무명초(無明草)'라 부르는 풀. 특별한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면, 끊임없이 다듬고 가꿔야 하는 풀.
입영전야의 젊은이가 떠오르고, 비구니 연기를 위해 삭발을 감행하던 배우 강수연의 결연한 표정이 생각납니다.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다던 법정(法頂)스님의 말씀도 겹쳐집니다. 시선의 구속과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놓여났으니, 심신(心身)이 가벼울 것입니다.

저도 가끔 삭발하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결심이나 의지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민머리로 햇볕을 받아보고 빗방울이나 눈송이가 머리 가죽을 두드리는 느낌이 궁금할 때입니다. 제 몸의 다른 부분처럼, 맨손으로 제 머리통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뿐입니다.

오늘처럼 이발소 의자에 앉아서 잠깐 상상해볼 뿐입니다. 거울 속에 비친 몸뚱이에 박박 깎은 머리를 얹어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썩 마음에 드는 모습은 아닙니다. 가족들이 극구 반대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같은 까닭이겠지요. 삭발이야말로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결국 늘 하던 주문을 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지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가위질은 시작됩니다. 칠년 동안, 제 머리카락을 다스려온 사람입니다. 아마 제 머리카락 씨앗의 종류와 품질까지 훤히 들여다볼 것입니다. 머릿속까지 들여다보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지우기 어렵습니다.

잘려나가는 머리털들엔 그르고 못된 생각, 실없고 부질없는 걱정의 근원이 들었을 것만 같습니다. 이 가위에 제 모든 사고의 채널들이 죄다 감지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위의 금속성이 저에 대한 평가의 말들로 들립니다. 딱한 사람이라며 혀를 차는 소리도 섞여있습니다. 조롱과 야유의 휘파람 소리도 들어있습니다.

"명색이 시인이라는 자의 머리가 황무지로군." "값나가는 생각의 종자는 약에 쓰려 해도 없네그려." "김수영의 시처럼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로군.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땅주인에게는 못 대들고, 이발쟁이에게'!"

아무려나, 이 의자에 앉으면 많은 일을 반성하게 됩니다. 헤어스타일만큼 정신의 태도와 형태도 가지런히 해보려 애를 씁니다. 절이나 교회 혹은 성당이 마음의 창문 안쪽을 들여다보게 한다면, 이발소는 머릿속 생각의 거울을 살피게 합니다. 임영조 시인의 시('이발을 하며')가 그런 생각에 맞장구를 쳐줍니다.

'일요일 아침/ 이발소 거울 앞에 앉으면/ 한 달 전에 헤어진 나를 만난다//말없이 주고 받는 눈인사/그새 우리는 많이 수척해졌군,…(중략)…정중하게 빛나는 가위 속에서/검게 자란 시간이 잘려나간다/턱 밑에 무성하던 교만이/단칼에 모조리 스러질 때는/감격으로 차라리 눈을 감는다…(하략)…'

삭발하던 날의 강수연 씨나 법정스님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마침 가위질을 마치고,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이발사가 마치 계(戒)를 이르는 노승(老僧)처럼 여겨집니다. 이 집 주인은 실제로, 팔십 가까운 노인. 이 어른의 평생을 마음대로 상상해봅니다. '이발소'에 관한 오래된 기억의 장면을 편집해봅니다.

이발소에는 이발 기술을 배우려는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허드렛일과 손님들의 머리를 감기는 일을 도맡았었지요. 어쩌면 이 노인도 그런 세월을 거쳤을 것입니다. 바리캉과 몇 가지 도구를 들고 나타나서,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던 '떠돌이 이발사'들도 있었습니다. 이분도 그런 시절을 보냈을 지도 모릅니다.

저 주름투성이 손이 기억하는 뺨과 이마와 뒤통수는 얼마나 될까요. 요즘 저는 저 손이 일을 멈추게 될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까봐 두렵습니다. 이 앞을 지나다니다가 '회전등'이 꺼져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것은 세탁소 아저씨의 죽음이나 단골 채소가게의 폐업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슬픔입니다.

특별한 종교가 없는 제게, 이발소는 성소(聖所)의 평화를 느끼게 합니다. 귓가에 와 속살거리는 칼과 가위의 이야기에 때 묻은 영혼이 씻깁니다. 마음을 바로 세워주고, 지난 계절을 정리해주고, 가야할 길의 눈금을 읽어주는 철(鐵)의 언어입니다. 그 차갑고 무서운 도구가 따뜻한 희망의 인사까지 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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