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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오래된 제사/박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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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는 것은
말간 백지가 오는 것이다

말간 술 한 잔
막걸리 잔 하나가 불현듯
내 앞에 놓이는 것이다
구름덩이 같은 흰 술
그 잔을 받아 비운 내가
떠올라
하늘 구름들 속에 섞이는 것이다

멀리 보이는 물 담아 논
논에 연두가 잠겨 있다
그 논으로 구름들이 그러하듯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서
나의 첫발을 담그고
모포기를 심듯이 아주 담그고

모포기를 심는 시늉을 하는 것은 물론
못줄까지 대며 가지런히 모를 심는 것은
내 흰 손이 기필코 이루어야 할
오래된 제사 의식이다
그 사람은
나의 하나님
사랑방 툇마루 앞에 선 배나무에
배꽃이 피어날 즈음이면

샘가 커다란 갈색의 고무 통에
씨나락을 담궈 하얀 벼 싹을 내고
그리고 당신과 나의 거울인 그 논들에
발바닥 도장 찍듯 깊이 엎드리셨다

[오후 한 詩]오래된 제사/박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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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생뚱맞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시 쓰는 사람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시는 시 쓰기에 대한 시처럼 보인다. 특히 "말간 백지"라든지 "못 줄", "흰 손", "오래된 제사" 등의 어사들 때문이다. 물론 농부 혹은 농사에 대한 시일 수도 있고 슬픔에 대한 시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이 세상의 이런저런 슬픔들을 정성껏 다독이고 다스려 정갈한 논 같은 시 하나 장만하는 게 시인의 일이지 않나 싶어서 좀 한갓지게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농부만 한 시인도 달리 없겠다 싶다. 시인의 성심에 견주어 이 여름날 농부의 수고가 덜할 바 없으니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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